길고도 먼 나그네 길을 되돌아 본다 » 글 김활영 원로선교사
어느덧 나그네의 마지막 여정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지나간 세월들을 돌이켜 본다. 누구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나도 어린 시절이나 젊은 날 들을 돌이켜보면 동화의 장면들 같은, 아련한 추억들에 그리움이 묻어나서 감상적이 된다. 허지만 인생 후반의 치열하였던 삶들을 돌아보면 그리움 보다는 후회가, 만족감 보다는 아쉬움이, 감격스런 장면 보다는 안타까운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 가는 인생살이가 점철되는 여정을 누군들 외면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원로들로부터 생애의 마지막에 서서 자기의 일생을 돌아보며 목회 일생이 실패작이라고 후회스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말을 자주 듣고 있다. 어찌 나 같은 부족하고 문제투성이가 씁쓸한 감정이 없을까. 물론 환희와 찬양의 시간도 있었고 감사와 감격으로 환호 자약하던 즐거웠던 사건들도 추억으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출발하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새로 시작 한다면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탠데 하는 후회와 아쉬움의 심경을 감추고 싶지 않다. ‘그렇게 보다는 이렇게 하였을 것’을 하는 일들이 내 생애에도 너무 많았던 것을 돌아본다. 실패와 같은 선교사 생활 40년, 짧다면 순간 같기도 하지만 길다면 지루하다고도 할 수 있는 반 세기 동안의 선교사란 멍에를 메고 걸어왔던 나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앞서간 선배 선교사들처럼 나의 생애도 나그네의 삶이었다. 마지막 여정이었던 말레시아 쿠알라룸풀에서 사역할 때에 두 번째 이사한 집에서 산 8년을 제하면 한 집에서 2년 이상 머물지 뭇하고 식구들을 끌고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생활을 오래도 했다. 나그네란 면에서는 적어도 선배 선교사 바울의 뒤를 따랐던 것 같다. 허지만, 만약에 주님께서 그날에 물으실 것처럼 “너는 그 동안 반석 위에 집을 세워 왔느냐? 모래 위에 세우고 있니?” 하고 물으신다면, “예! 모래가 아닌 반석 위에입니다”라는 자신 있는 대답을 할 수 없는 자신이 답답하다. 주님 잘 모르겠습니다. 실패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나 자신을 돌아볼 눈을 열어 주셔서 깨닫게 하여 달라는 기도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오늘까지의 나그네 길 40년 여정도 주님의 은혜로 걸어 왔습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로 40년 나그네 삶을 표현할 뿐이다.
반년을 기다리던 선교사 비자가 나왔다는 필리핀 대사관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태어나 100일이 채 안된 필립을 비자에 포함시키는 수속을 한 다음, 교단 총회 선교부 총무인 한명수 목사를 모시고 파송 예배를 드렸다. 파송 예배에는 교수로 사역하도록 중간에서 필리핀 성경학교를 소개하여준 연합세계선교회( United World Mission)의 박배의 선교사(Flitkraft)가 격려사를 해 주었고, 한국에 와서 선교연구를 하고 있던 필리핀 복음주의 선교회(Philippine Evangelical Mission)의 달리사이 목사(Cornelio Dalisay)가 환영과 축사를 해 주었다. 파송교회 담임이셨던 김창렴 목사는 한국교회 선교를 위해 변하지 말고 서로가 신의를 지키자고 다짐을 하였다. 그때 시작한 동신 교회와 동역은 지금까지도 서로 변치 않고 계속되고 있다.
아직 잔설이 남아있는 1977년 3월 30일, 필리핀 회사가 건축했다는 김포 비행장 청사를 거처 대한 항공의 작은 비행기로 4시간 정도 날아가니 갑자기 태양이 작열하는 마닐라 공항 허름한 환영 대에서 대학생선교회(CCC)의 나일스 선교사(Niles Backer)가 차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고, 필리핀 북단에 있는 라왁(Laoag)시에 소재한 조그마한 성경학교 (Independent Bible Institute)의 학감인 Ruth와 Josue 내외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수로 심겨진 야자수 잎새에서 남국에 와 있다는 강열한 인상을 안고 호텔 같이 커다란 성경번역 선교회(SIL) 게스트 룸에 짐을 풀었다. 이렇게 나그네 여정은 시작 되었다.
준비도 없이 6월에 시작하는 성경학교 새 학기부터 강의는 시작되었다. 교장이던 땅아리안 목사(Rev. Tangalian)에게서 일로까노 어(Ilocano) 공부도 하면서 그의 통역을 거처 생후 처음으로 영어로 강의하였다. 내 콩글리쉬를 알아듣지 못하면 필담으로 의사 소통하는 강의가 어떡하였으리 라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이 때부터 언어문제는 평생을 두고 짐이 되어 왔다.
빨리 약속했던 두 학기를 끝내고 언어훈련을 한 다음 일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서 사역에 대해 고민하며 사역지를 찾아 이 사람 저 선교단체와 교회와 교제를 시작하였다. Laoag시에 거주하던 미국 선교사(Lutheran Missouri Synod)의 많은 도움을 받으며 그들의 팀 사역 선교에 많은 도전을 받았다. 일단 마닐라로 돌아가서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두고 기도하며 우선 국어인 따갈록(Tagalog)을 배우면서 기다렸다.

마침 홍콩 모리슨 기념관에서 모였던 교단 선교부 회의에서 필리핀에 장로교단을 설립하는 비전을 발표하고 선교사를 더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국 선교도 많은 선교사들이 팀이 되어 서구 선교사들처럼 대 규모의 사역을 해보자는 꿈을 꾸면서 Evangelical Presbyterian Mission, Inc. (EPM) 라는 이름의 선교단체를 등록하였다. 장 선교사가 한국에서 동역하거나 알고 있었던 미국 선교사들이 (CCC, CIA-Christians In Action 소속) 선교 법인체의 설립 이사로 도와주었다. 이 법인체가 필리핀 장로교단의 모체가 되었다. 또한 수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필리핀에 들어오게 되는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사역은 40년 선교의 주체가 되는 선교 팀(EPM)에 집중되었다. 선교 팀을 조직하고 이 팀을 이끌어 가려니 별별 상황을 경험했다. 팀을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만의 사역을 생각하였다면 형편은 많이 달라젔을 것이다. 선교를 혼자만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팀을 벗어 날 수는 없었다.
서구 선교사들이 이미 체득하고 다양하게 발전시켜온 모델들을 참고하여 나름대로 선교부를 조직하고 세우려니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선교 현지 밖의 사람들은 필리핀 선교사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고 오해하고 안타까워만 할 뿐 누구도 도움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교단 본부에 요청도 해보고 후원교회의 도움을 구해보았으나 뾰족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보다는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경험 있는 서구 선배 선교사 들이 조직을 느슨하게 시작하여 차츰 발전시키는 지혜를 동원해 보라고 권면은 해 주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자기들도 한국교회를 모르는 상황에서 일반적인 자기들의 경험적인 해결책을 말할 뿐이었다.
한편, 지난 ‘70년대에는, 서구교회의 진보계열 교회는(Conciliar Circles) 복음 전도에 관심이 식어갔다. 선교신학에 혼선이 생긴 결과였다. 복음 자체 보다는 전략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복음화냐(Evangelization)? 인간화냐(Humanization)? 기독교화(Christianization)냐? 세속화(Secularization)이냐? 하고 토론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대신에 복음주의 진영 (Evangelical Circles)은 영혼 구원의 복음전파에 열심을 일으켜 세계 선교 중심세력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다. 이를 터면 로잔대회(Lausanne Congress)와 같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에 의한 선교운동이 복음 전파의 열정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한국교회 역시 6.25의 민족적 수난 시대를 거처 오면서 가난하고 힘든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오순절적인 성령의 역사와 순교자적 영적 지도력에 의하여 복음 전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특히 빌리그래함 전도대회(1973)와 엑스 폴로 74를 위시하여 대규모 영적 각성과 전도운동이 전국을 강타하여 교회성장이 눈에 띌 정도로 현저해 졌는가 하면, 경제적 빈곤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관민의 노력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80년대는 훌쩍 경제성장을 하였고, 정치적으로도 군사 정권이 민주세력으로 대체하기 위한 몸부림이 열매를 거둬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여권 발급이나 해외 송금에는 아직도 쉽지 않은 가난하고 불안한 때 였다.
이런 사회 문화적인 상황에서도 김활란, 조동진, 김준곤, 김의환 박사와 김창인, 김창렴 목사 같은 선교열정을 가진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선교적 교회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총신대학 캠퍼스에서는 학생들 사이에 선교 운동이 일어나고 선교 헌신자들이 나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백병수, 김활영, 김유식, 박기호, 여상일, 홍희헌, 강채식, 유동원 등) 추수밭인 필리핀에 먼저 와서 선교팀 구성을 시도하였다. 1 김활란은 IMC 예루살렘 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여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이화여대 총장으로 학생들을 동원해서 파키스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조동진은 선교학을 공부하고 와서 본격적인 선교운동을 일으키고 선교 단체를 조직하고 많은 선교사를 훈련하여 파송하였다. 김준곤은 대학생들을 선교로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전도의 불을 한국교회에 붙였다. 김의환은 직접 선교사로 지원하였지만 비자 거절로 포기하고 교수로 학생들을 선교 동원하였다. 김창인, 김창렴은 지교회 목사로 교회를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의 영향은 현대 한국교회 선교운동에 지대하였다. 총신대학 안에는 Student Missionary Fellowship 같은 동아리가 생겨서 선교사 자원이 힘차게 자라고 있었다. 이들이 현대 한국 선교운동에 기둥들이 되었다.
이들 초기 선교사들에게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선교부를 조직하여 팀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EPM이 속속 들어오는 동료를 맞이하였지만 현지 선교부를 조직하여 팀을 만드는 과정이 옛날 산동 선교부에서처럼 쉽지 않았다. 이 분야는 총회 선교부도, 선교사를 파송한 지 교회들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선교현장을 복잡하고 어렵게 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에게는 처음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이었다. 이때까지 한국교회 선교 역사에서 아무 곳에서도 다섯 가정 이상이 한 지역에서 팀을 구성하여 선교를 시작하거나 추진해 본적 없는 개척의 길이었다. 세 가정이 한 지역에 파송 된 적은 있지만 다수가 그것도 비슷한 기간에 한꺼번에 모인 선교지는 없었다. 여기서 시작된 시행착오와 이에 따른 아픔은 아직도 많은 선교지에서 반복하고 있는 실정이 한국교회 선교다. 아직까지도 풀지 못하는 숙제로 남아있다.
추수터 필리핀은 한국교회에게는 가장 매력 있는 선교지였다. 선교지를 두고 기도할 때에 하기 선교대학원에 강사로 온 맥거브란(Donald McGavran) 박사가 “한국 선교사는 쉽고 열매가 많은 추수밭같은 선교지로 우선으로 보내야 한다” 는 충고를 따라 필리핀을 선택하였는데 과연 추수 밭이었다. 그 후에도 가장 많은 선교사가 필리핀으로 몰려왔다.
1990년 대에, 중국이 문을 열기까지 필리핀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총회선교부는 파송하고있었다. “한국교회 필리핀 선교 35년사”에 (130-133 페이지) 의하면, 1977년 한 가정으로 시작하여 30년 동안 135 units, 즉 200 여명을 투입하여, 동 시대에 같은 필리핀에 활동하던 미국 남 침례교 선교부와 비슷한 파송선교사를 보유한 선교팀이 되었다. 2 GMS 는 지역별로는 그간 최대 다수의 선교사를 남방 산호섬에 파송하여 왔다. 1980년대 초반에 교단 집중 선교지로 결정하고 다수의 선교자원을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2016년 현재도 파송 숫자가 중국에 (222 units) 이어 필리핀(102 units)은 두 번째 많다. (2016 GMS 선교사 백서, 18-19)
서구 선교 팀의 구조나 조직을 흉내 낸다고 선교부가 잘 운영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체험하였다. 1980년대는 이 고민을 안고 선교사 사이에도 때로는 심각한 마찰도 있었고 심지어 선교사 제명이란 불상사도 있었다. 1982년에 6 가정만이 “주비 장로교 선교부”를 조직하였지만, 그 이후로 도착하는 선교사들을 맞이하는 데는 싱갱이가 너무 많았다. 첫 선교사가 1979년도에 귀국하여 1980년대에 30 가정만 보내주시면 100개처 이상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증파를 호소할 때는 언제인가 싶게 도착하는 선교사들이 우선 팀을 구성하는데 무거운 짐이 되기 시작하였다. 홍역을 치른 초기 선교사들은 어느 정도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후에 도착한 분들은 선교부란 조직이 도움을 주기도 하였지만 생소하고 불편하고 잘못하다가는 인맥에 연루되거나 분파로까지 번 저가는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 하였다. 여름 수도인 바귀오(Baguio)시에 모여서 전략을 구상하고 팀워크를 논의하는 소위 바귀오 회의(Baguio Summit) 이후(1980년 1월 25일 Baguio 김 선교사 자택) 선교비도 공동재정 정책을(Pooling System) 실행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1980년대 말에는 선교부 해산이란 극약 처방까지 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와서 EPM은 다시 추스르고 느슨한 팀을 만들었다. 선교사들이 각각 다른 선교 목표와 전략을 가지고 1987년에 조직된 필리핀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Philippines, PCP) 뿐 아니라 필리핀 어떤 교회와 사역하든지 상관 않기로 하였다. 그러는 중에 민다나오에 주재한 선교사들이 강력한 조직체를 만들고 팀 사역을 시도 하여 보았지만 오래 지속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EPM자체로는 팀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지만 1991년에는 한국과 미국에서 파송 받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소위 “마닐라 선언 (Manila Manifesto)‘을 선포하였다. 특별히 교회 개척에서 필리핀 장로교단 (PCP)을 중심으로 사역하기로 하고 선교지 분할 정책(Mission Comity)을 통해 선교지를 분담하고, 새 선교사가 도착하면 합동훈련 (orientation)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선교부는 한국의 합동, 통합, 고신, 합동보수, 미국 정통 장로교와 GP, CCC, 기타 독립 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총회 본부는 끊임없이 지부 조직을 강화하고 팀 사역을 할 것을 종용하여 왔지만 지부는 법적인 울타리 역할과 친교의 장 정도였고, 다만 철학과 뜻이 맞는 선교사들 끼리 협력하고 공동 사역도 하는 팀으로 발전 하였다. 2007년에 소위 새 가족이 들어오면서 이런 현상은 더 굳어지게 되었다. 새 가족이란 1980년에 교단을 떠나서 이북 계열과 호남의 교회들이 다시 모 교단으로 복귀하면서 소위 개혁 측에 있던 선교사들이 다시 총회 선교부에 복귀한 사건을 말한다. 현재도 여러 개의 지부조직으로 나누고 팀들을 만들었으나 공동 목표와 전략, 같은 동역자 의식으로 뭉쳐진 효율적인 팀을 만드는 데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1991년 까지는 분주하고 열심을 쏟아 부은 기간이었다. 선교지에 처음 도착하여 얼마 되지 못하여 나약한 건강 문제로 선교사를 포기하여야 할 정도로 지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하였다. 입원까지 하고 온갖 조사를 하여도 혈액관계가 비정상적이라고 하였지만 정작 무엇이 원인이고 어떤 분야가 문제인지를 발견하지 못한 의사는 “당신은 목사이니 건강을 당신의 하나님께 맡기세요”. 하고는 포기를 선언한다. 좀 쉬어야 겠다는 생각에 바귀오로 옮겨서 건강 문제는 잊어버리고 사역을 두고 고민하고 특히 팀을 구성하는 문제로 이리 뛰고 저리로 달려가는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다 보니 건강을 두고 걱정할 일은 없어져 버린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나의 3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병원과 약은 별로 관계를 갖지 않았다.
대신에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동역하던 하도례 선교사(Theodore Hard)가 “김 목사는 감투가 너무 많소” 하고 나무랐다. 하 선교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알고 그에게 강의도 듣곤 했는데 한국을 떠나 필리핀으로 옮겨서 도서관을 갖추는 일과 개혁주의 중심으로 강의하도록 그의 선교부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에 필리핀으로 파송을 요청한 분이다. 사실 그랬다. 장로교단 설립이 목표였던 EPM은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시작하였는데 (1983년) 첫 번째 교장을 맡아서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교 구색을 갖출러니 교장인 동시에 교무, 생활지도, 기숙사 사감이나 부엌에서 밥하는 일이나 청소문제 까지 간섭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나보다 잘할 수 있는 동역 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마음에 들지 않으니 간섭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 가면 여러 교회의 당회장이다. 노회에 가도 교단 총무위에서 군림하는 지도자다. 선교사들의 모임에 가도 선배 역할로 말이 많다. 결국은 실력 없는 교수, 영력이 떨어지는 설교자, 존경 받지 못하는 지도자로 감투에 어울리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열심 있는 선교사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선교부 구조상 그렇게 할 수 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마닐라 선언(Manila Manifesto) 이후에는 모든 사역을 후배 선교사들에게 맡기고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필리핀을 떠나지 못한 두 번의 안식년 기간에는 건강 문제와 선교부 내부 문제로 2년을 보내면서 시작했던 학위 과정은 끝내 마무리 못했다. 이번에는 학위과정을 끝내겠다는 다짐을 하고 동역자 박기호 선교사가 적극 추천하는 풀러 신학교로 갔다. 그러나 학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감당하기가 특별 장학금이 없는 한 어려웠다. 이 소식을 들은 은사였던 나성한인교회 김의환 목사는 Mississippi 소재의 개혁신학교를(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RTS) 적극 권했다. RTS를 방문하여 참 좋은 인상을 받았다. RTS는 첫 선교학 박사 과정을 열면서 절대 다수의 한국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하였다. 학비는 온 가족이 다 공부를 해도 풀러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영어였다. 영어 시험에 아내는 합격했으나 나는 떨어졌다. 영어로 강의도하고 사역도 했는데 시험에는 불 합격이었다. 평생에 시험에서 떨어져 본 것은 군대에 갔을 때 진급 사격시험과 이번의 영어 시험이었다. 학교에서는 영어를 다시 좀 해야 한다고 했으나 나는 포기한다고 하니 학교에서는 어찌든 강의를 들어 보라고 했다.
10명 가까운 박사과정 학생 중에 선교사는 나 하나였다. 필리핀을 잊어버리고 강의를 듣고 페이퍼를 써 냈다. 아내도 석사과정을 새로 하면서 우리는 밤새워 페이퍼 쓰기에 열정을 쏟았다. 아이들도 사춘기에 들어가는 녀석까지 3명을 합해 온 가족이 다 학생이 되었다. 페이퍼가 새빨갈 정도로 단어 수정과 문장 수정을 한 페이퍼가 돌아 왔으나 성적은 거의 모두가 A 나 A+로 나와서 출판을 해도 되겠다는 것이다. 늙은 학생(벌써 50대에 들어섰다)이라고 격려해주는 줄 알았는데 영어에 훨씬 뛰어난 후배 혹은 미국 학생들조차 성적이 내 정도 나온 학생은 드물었다. 영어보다도 내용이 더 중요한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배웠다. 선교사인 내가 선교 문제를 실제로 안고 있어서 내용도 자연스레 선교 실제에 접근한 것이 가장 좋은 인상을 모든 교수들에게 준 모양이었다.
맨토였던 놀톤 (Norton) 박사는 아프리카 선교사 출신으로 Nigeria에서 신학교를 만들었고 Wheaton 대학원장을 지내고 은퇴한 분이었고, 선교학 과장인 롱(Paul B. Long)박사는 아프리카와 브라질에서 사역한 베테랑 선교사 출신이었다. 이들은 신학교 교장을 한 나를 항상 교장 선생님 이라( Mr. President) 부르며 격려하면서 필리핀에서 공부한 학점을 몇 과목 인정하여 주면서 논문을 하나 더 쓰라고 하여 ThM과 DMiss 학위를 동시에 받았다. 석사 논문은 교단의 산동선교 역사이었고 박사 논문은 교단의 선교운동사 (1959년 분열 이후부터 1990년까지)를 정리한 것이었다. 어떤 학위도 받아보지 못한 내가 그것도 2년 만에 석사와 박사가 되니 너무 싸구려 학위가 아니었나 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2년간 앉아서 먹고 페이퍼 쓰느라고 평생 말라깽이 이었던 내가 배가 나오고 몸무게가 80kg까지 올라가고 있던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때에 벌써 내 몸의 여러 기관들이 고장 나기 시작한 것을 깨닫지 못한 체 다시 선교지로 달려가서 쥐꼬리만 한 선교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동역 자들의 사역을 살펴보니 한심하다는 교만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예 신학교에는 관계를 끊고 교회성장을 위한 조직을 하나 만들어 PCP를 교단으로 재대로 성장시켜 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동역자들과 옥신각신하였다. 그런데 안식년 떠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권위가 이제는 먹혀들어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후배들이 성장해서 그런지 내가 너무 뒤처져 있어서 그럴까?
그러는 와중에 당시에 자녀교육 문제로 고민하는 필리핀 선교사들의 요청도 있었고, 이미 내 자녀들을 미국에다 팔아버렸다(?)는 자괴감 때문에 딱 1년만 생각하고 한국 아카데미 설립을 맡았다. 한국으로 달려가서 마침 교사선교회를 찾아가서 10명 가까운 선생님들을 설득하여 3년간만 휴직하고 필리핀에 와서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선교사가 되어주시오 하였더니 먹혀 들어 갔다. 한국아카데미가 시작되었다. 필리핀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들을 중심으로 후원회를 조직하니 영락교회(당시 임명수 목사)가 앞장을 서 주었다. 컨테이너에 가득히 기본적인 학습 자료와 교구들을 싣고 와서 마닐라지역에 큰 집을 세로 얻어 교실과 강당을 꾸미고 운동장은 이웃의 학교를 가끔 빌려 쓰면서 유치원부터 6학년까지 분장하여 학교 모양새를 갖추어 갔다. 필리핀 선생님들을 몇 분 청빙하여 영어로 산수와 과학 등을 가르치게 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국제적인 시야을 가진 사람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여호와를 힘써 알자 (호 6:3)”는 교훈을 걸고 성경을 중심으로 교육한다는 철학을 자지고 출발한 것이다. 1년을 끝내고 전문인들인 교사에게 맡기고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났다.
1994년 예루살렘에서 교단 선교부 선임 선교사들이 모였다. 거기서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한 선임들의 요청은 신학교를 위시한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필요한 현지인 교수 요원을 우리가 힘을 합쳐 빨리 양성해야겠다는 결정을 했다. 위원으로 위촉되어(총무) Jakarta와 Bangkok을 오가며 대학원을 준비를 했다. 결국은 보고들은 미국선교사들을 흉내내는 길 밖에는 새로운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 미국 선교부들도 현지인을 미국에 대려다 교육하여 현지인 교수를 만들려 해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특히 두뇌유출(Brain Drain)이 골치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지역 신학교 교수들을 현지에서 훈련하여 학위도 주고 실력을 갖추어 현지인 지도자 양성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지름길로 찾았다. 그런 학교를 영어 사용국인 필리핀에서 여러 선교단체들이 운영하고 있다. 그런 모델로 구도를 잡고 학교 위치를 필리핀이나 싱가포르를 생각하고 상당히 준비를 진행했다. 그런데 갑자기 은사인 김의환 박사가 오랜 꿈이었던 총신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필리핀 신학교 졸업식에 다녀가셨다. 이미 미국에서 제 3세계 지도자 양성을 위해 국제신학교(ITS)를 설립 운영하고 있던 김 박사님은 선교사들이 구상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들으시고는 총신으로 가져 가고 싶어 하셨다. 미국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점은 있어도 벌써 PTS에서 총신으로 학생을 보내어 어려운 문제를 당면했던 나는 내키지 않았다. 김 박사님은 강권하면서 나를 총신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눈치를 보니 동료 후배들은 나도 필리핀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PM에서는 박기호 선교사도 풀러로 떠났고, 선배인 백병수 선교사도 팔라우로 옮겨갔다. 김유식 선교사는 필리핀에 있으면서 EPM과는 상관없이 지금까지도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여러 명이 필리핀을 떠나 제2의 사역에 헌신하고 있었다.
총신대로 가서 개설된 선교대학원을 인가를 받고, 그 안에 국제 사역과를(Global Ministry) 두어서 현지인 교수 후보생을 모집 하였다. 이해가 부족했는지, 많은 선교사들이 참여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총신이 주장해서 그런지 현지 신학교를 운영하는 선교사들이 학생들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 계속 교육 차원의 프로그램에는 많은 참여가 있었다. 김 박사는 나의 일 추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나 역시 총신대 교수로 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참이었다. 총장은 총회 선교국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 오셨다. 교단에서는 처음으로 선교사 출신으로 선교행정을 맡아 잘 정리하고 질서를 세웠던 강승삼 선교사가 선교국을 떠나고 싶어 하였기 때문이었다.
생각지 못한 요청에 전혀 마음이 없었지만 마지못해 귀국 2년 만에 선교국으로 가서 강 선교사가 추진하고 있던 선교부 조직 구조개편을 두고 고민하였다. EPM에서 경험했던 문제여서 관심이 갔다. 해결책을 윈터 박사의 (Ralph Winter) 이론 모달리티(Modality)와 소달리티(Sodality)에서 찾아보려 연구했다. 총회 선교부란 모달리티 구조에서 최대한 소달리티화 하는데 집중하고 조직하려 노력하였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 보내기 경쟁이라도 하듯이 선교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던 때다. 선교사 숫자의 증가는 놀라웠고 이에 상응하는 선교사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해마다 50명 이상 어떤 해는 100명도 넘게 새로 파송하는 선교사를 안내하고 배치하여 사역을 돕는 역할을 본부가 어느 정도까지 해야 되는지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파송하려는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모아서 선교사들에게 전달해주는 작업이라도 효율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대상을 두고 일하는 선교사끼리 협력하거나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본부는 어떤 도움을 줄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였다. EPM 경험을 참조하여서 조직과 행정을 쇄신한 제도를 개발하였다. 선교부란 총회의 상비 부서에서 독립하여 “총회 선교회(Global Mission Society)”, 약어로 GMS 란 이름의 독립된 조직을 만들었다. GMS는 한국 선 교계에서 주목을 끄는 선교 단체가 되었다.
선교사 숫자에서 다수란 특징도 있었지만 교단 총회에 소속되어있는 독립된 조직이다. 그래서 타 교단이나 선교단체 중에서도 GMS와 비슷하게 조직을 바꾸는 곳도 있었다. 한국교회에서 특수한 조직과 행정 체계를 갖춘 대표적인 선교단체로 통했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빨리 모달리티화 되어 굳어버린 점이 아쉬웠다. 소달리티로 출발하였는데 결과는 다시 모달리티가 되어버린 꼴이다. 즉 교단 정치의 흐름에 빨리 적응해서 정치화 되었다고나 할까? 실제로 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지도자가 리더가 되기보다는 정치에 앞장서는 리더가 GMS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시대적인 특수한 선교 사명을 감당하는 선교기구 이기 보다는 “그저 있어야하는” 교회의 한 기관으로 안주해버린 GMS가 안타까웠다. 시대는 변화를 요청하고 있는데 변해가는 시대를 정지시키고, 하나의 선교기구로 버티고 있는 GMS가 아쉬워 짐은 산고의 고통이 적어서 그럴까?
2004년,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왔다. 목회를 하다가 조기 은퇴하고 선교지로 가는 친구와 같이 돌아오자 말자 아시아 선교회(Center for Asian Reach Out, CAR)를 3 Asian은 Asian에 의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할 수 있다면 같은 문화권에 속한 자들이 책임을 지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만들어 선교하는 교회로 변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미 크리스탠덤(Christendom)에 익숙해진 교회는 주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신 “그의 나라 (His Kingdom)”를 나 자신도 신생 교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이미 서구 선교단체들은 필리핀을 철수하고 있었다. 특수 팀만 남기고, 주로 선교 훈련기관만 보강하고 일반사역 팀은 이미 필리핀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필리피노 들이 선교단체를 만들어 대규모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다. 필리핀선교 단체협의회 (Philippine Missions Association, PMA)를 조직하여 선교사 훈련과 파송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PM3란 비전 (2010년 까지 200,000 Tent Makers와 Career Missionaries파송) 을 제시하고 온 교회가 선교로 뜨거워 있었다.
선교사가 처음 도착 당시부터 필리핀은 무르익은 추수 밭이었다. 아니, 추수 밭이라 하기보다는 새로운 선교 사역을 계승하는 모판이었다. 선교적인 교회로 성숙하여 재생산하는 추수 꾼의 모임이었다. 정치 사회적으로 처음 선교사가 도착 하였을 때는 마르코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20년 장기 독재를 하던 때이었다. 독재도 민중혁명 (People’s Power)으로 무너졌지만, 반정부 세력인 공산당과 끊임없이 독립하려는 무슬림의 반란은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문화 사회적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한 민주국가에서 부패와 가난의 국가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아시아 제국에서 많은 유학생이 찾아와 아시아에서는 그래도 선진 문물을 배우고 갔다. 이 때 한국 유학생은 모두가 석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국교격인 가톨릭이 극도로 토속화되어서 영적으로 영향력을 잃고 있던 참에 필리핀 산 기독교계 이단들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서구의 개신교 대소 선교단체들도 필리핀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한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부터다. 새로운 복음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70년대에 필리핀 주재 외국 선교사들은 약 3,000 units 이나 되었다. 신참 선교단체를 맞이하는 기존 교회들도 영적 각성을 하기 시작하던 때 이었다. 1966년 베를린 선언에 동참하였던 필리핀 교계 지도자들이 돌아와서 부흥과 복음전도에 열을 올렸다. 1977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와 1980년대에 시작한 DAWN(Disciple A Whole Nation) 운동에 필리핀 전 교계와 선교단체들이 참여하여 민족 복음화 운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필리핀 교회가 부흥하여 오던 때가 바로 지난 40년이다.
1970년대에 7,000 여개처 교회에 불과하였던 필리핀 교회는 DAWN 운동으로 21세기가 시작 될 때에 50,000 개 지교회로 부쩍 성장했는가 하면, 한국교회 못지않게 일찍부터 시작한 해외 선교에 열심을 내어 아시아에선 선두 주자로 선교에 힘쓰고 있는 선교적 교회로 성장 발전하여왔다. 이렇게 복음 운동이 활발하던 필리핀 교회와 함께 GMS는 40년을 필리핀 복음 운동에 참여하여 왔다.

1980년에 총회 선교부가 마닐라에서 선교전략 회의를 모였을 때에 강사로 온 선교사로 주한 선교사 경력이 있는 남침계교 선교부의 지대명 (Albert Gamage) 박사는 “한국 선교사는 선교의 목표가 분명치 않은 것 같다”라고 이제 막 시작하는 한국 선교사들 사역을 분석하고 “구체적인 선교 목표”를 정하고 일을 시작할 것을 조언하였다. 효과적인 선교전략은 분명한 목표 설정에서 나온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확정되어야 어떻게 할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와 선교팀(GMS)은 필리핀에 장로교단을 설립함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복음전파를 위한 단순한 선교전략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장로교단 설립과 발전이 바로 구체적인 선교 목표 자체였다. 이 목표는 총회 선교부가 홍콩에 모였을 때에 제시하였고 환영을 받았다. 바귀오 회의(1980)에서 동역자들이 동의하였고, 마닐라 선언(1991)에서 참여 선교단체가 재확인한 목표였다.
이 목표를 중심으로 나의 사역 진행 역사를 살펴본다. 선교 시작 10년이 되는 해에 (1987년 6월)에 필리핀 장로교단을 조직하였다. 이 독립노회 (General Presbyte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Philippines)는 노회원 10명 (선교사 7명과 필리피노 3명)으로, 2개의 상임 부서 (전도부와 교육부)와 3개 시찰과 23개처 지교회들로 구성되었다. 필리핀 교계에도 PCEC (Philippine Council of Evangelical Churches) 회원이 되었다. 본국사역 (총신대학교와 선교국)으로 귀국하였을 때에, 즉 다음 10년이 지나서 독립노회가 여러 노회로 증식하여 총회로 (The General Assembly of the PCP)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10년은 장로교단 발전에 관련된 여러 가지 전략들이 세워지게 된다. 이런 전략적 사역을 위해 총회에 여러 종류의 상임부서를(구제, 출판, 선교 등) 두기도 하고 독립적인 기관도 만들었다. 이 마지막 10년 동안은 상당기간은 필리핀을 떠나 말레시아로 옮겼다.
유치원, 초 중등학교는 물론, 신학교를 위시하여 각종 지도자 양육 프로그램들이 활발하게 개발되었다. 마지막 10년은 새 가족이 섬겨온 여러 가지 사역이 보태어져서 사역이 더 활발하여 졌으나 불행히도 필자가 개척한 필리핀 장로교단과 직접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교회와 사역들이 많았다. 그러나 400여처 지 교회들로 구성된 장로교단 (PCP)을 필리핀에 남겼다는 것은 주님의 큰 은혜이었다. 교파이식이란 비판을 면할 수 없는 장로교단 설립의 목표 보다는 신학적인 이유나 선교사 개인적인 관계, 혹은 신념 등으로 독립교회, 혹은 전도나 양육을 위한 특수 사역이나, 사회를 하나님 나라로 변혁을 도모하는 목표와 이에 따르는 사역을 개발하는 선교사들도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상당한 숫자의 선교사를 이 곳에 투입한 GMS에게는 PCP를 발전시키는 사역과 함께 이 시대에 필요로 하는 목표 재설정이 남은 과제일 것이다.
이제는 PCP 설립과 성장을 위한 전략들을 돌이켜본다. 주된 전략은 교회개척(Church Planting)과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사역을 들 수 있다. 먼저 교회개척을 돌이켜 보면 역시 후회스런 이론들이 너무 많다. 좋은 전략은 목표와 최단거리라고 와그너(Peter Wagner)는 피력 하였다. 교회개척도 크게 보면 전도와 양육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처음에는 전도지를 제작하여 거리 및 축호전도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로 사용한 전도전략은 성경 공부반 (Home Bible Study Group)이었다. 가톨릭이란 기독교 문화권에 있는 사회이고, 제 2 바티칸 회의 이후 성경이 모든 가톨릭 신도들에게 열려진때 이었으므로 성경을 공부하자는 초청에 누구나 긍정적인 반응을 하였다. 마침 각 선교 단체에서 성경 공부 반을 위한 적절한 좋은 교재를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성경 공부 반은 바로 가정교회로 발전하고, 가정교회는 곧 정기적인 집회와 모임 장소를 마련한 조직된 교회로 자라나는 것을 경험하였다. 익은 알곡을 거두어들이는데 더 없이 좋은 전략이었다.
성급한 선교사들은 순서를 바꾸어 신자가 없는 곳에서도 모임 장소를 준비하고 교회개척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개척을 선포하는 한국식을 시도하였다. 한두 사람을 앉혀놓고 예배도 드리며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국식 교회개척을 적용하여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회심자는 성경 공부반을 중심으로 많았다. 예배 형식으로는 명목상의 신자를 양산할 수는 있어도 진실한 회심자를 얻기 어려웠다. 명목상 가톨릭 교인에서 역시 이름만 개신교로 교적을 옮기는 예가 너무 많았다.
양육 역시 한국식을 적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한국교회도 사경회와 부흥회를 통하여 개 신자의 신앙성장을 도왔다. 가정 성경 공부반 (Home Bible Class)은 대표적인 양육 프로그램이었다. 주일에 모이는 성경 공부반 운영도 좋은 양육 프로그램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교사나 전임 목사보다는 개인적인 은사가 있는 지도자가 나서서 성경 공부을 하도록 권장하는 것이었다. 어려웠던 것은 누구나 성경을 가르치면 호칭이 곧 목사가 되고 목회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상황은 바뀌고 있는데 한국적인 크리스탠덤의 교회관에 굳어진 교직제도를 넘지 못했던 관계로 교회구조가 새로 일어나는 필리핀 교회를 수용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런 아쉬움은 지도자 양성에서 더욱 안타까운 주제였다. 장로교단 설립에 시급히 필요하였던 전략 중에 하나는 지도자 양성 이었기에, 1983년 6월에 장로교 신학연구원을 (Presbyterian School of Theology) 개교했다.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우는 사역은 한국 선교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교명을 곧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PTS)로 바꾸었지만 다양한 학위 프로그램으로 (Diploma, B.Th., MCM, M.Div. 등)으로 시작하여 나중에 학위 인준기관으로부터 인준을 받을 뿐 아니라 필리핀 교육부에 등록도 하였다. 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가교사부터 시작해서 캠퍼스까지 구비하고 도서관까지 갖추기도 하였다. 선교사를 중심한 교수진은 PTS 출신의 교수로 대체되면서 학교 운영도 장로교단에 넘겨주었다.
학위 프로그램 외에도 여러 종류의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장로교단 지도력 개발에 주역을 담당하였다. PCP 밖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서도 지도자 양성에 기여하여 왔다. 개혁주의 신학 보급에도 한 몫을 하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 베트남 장로교단을 위시하여 아시아 제 교회에서 보내준 지도력과 필리핀 여러 교회 지도자 개발에도 기여한 전략이었다. 후반에는 총신대학교와 협력하여 총신 국제대학원을 캠퍼스 시설을 이용하여 운영하므로 한국 선교사 계속 훈련에도 참여 하였다.
교회 지도력 개발에 중심축 역할을 신학교가 하여온 현대 선교에서 서구적이면서 동시에 한국에서 성공한(?) 모델을 그대로 적용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이라 하기보다는 교회 역사적으로 발전한 지도자 양성의 모델이 한국 선교에서 인기(?) 있는 전략정도를 넘어서 교회개척과 함께 필수과목의 선교사역이 된 것은 무언가 부족하거나 심지어 잘못된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 시대에 내가 해야 할 선교사역은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세계선교계의 흐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다시 필리핀에 순회 선교사 자격으로 돌아 온 후에 CAR 운동 시작과 함께 아태아 연구 모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신학교육의 좀 더 효과적 인면에 초점을 두고, 아시아에서 신학교육을 하고 있는 동료선교사들을 PTS에 모았다. 이 모임이 (Association for Theological Education in Asia, ATEA) 정례화 되어 매년 한 번씩 모이면서 신학교육, 즉 지도자 양성에 대해 연구를 깊이 하게 되었다. 교회개척과 함께 지도자 양성이 관심의 대상으로 반성하고 있는 시기였다.
교회 개척과 지도자 양성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교육사역, 제자 훈련, 의료, 구제, 봉사, 어린이와 청년 사역, 사회 개발과 복지, 각종 문화 사역을 동료들은 기획 추진하여 왔다. 그 중에 유치원 사역은 일찍부터 개발한 전략이었고, 지 교회가 전도와 성장에 유용하게 사용한 전략이었다. 초 중등학교 역시 중반부터 개발한 전략이었고 규모를 확장해 가고 있다. 필리핀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는 교육 프로그램들은 PCP 설립 발전이란 목표를 떠나서 매우 효과적이고 시의 적절한 전략이라고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스포츠와 여러 종류의 문화행사, 의료를 포함한 단기선교, 공동체 개발사역, 선교 프로그램 등등의 제 전략이 역시 동원 되었고 성과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다양한 전략적 접근은 선교 3.0 시대를 열어가는 필리핀 선교의 새로운 현장에서 나도 모르게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에 주재하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불편한 존재가 되는 인상이 차츰 깊어졌다. 나의 리더쉽에 문제가 생기고 나아가서 동료들과 선교 신학과 전략에서 갈등을 느끼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리핀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마침 세계 선교 추세의 주 화두였던 전방개척 선교운동에 (Frontier Mission Movement)에 관심이 갔다. 윈터 박사가 선구자적인 영향을 미친 미국 세계선교 센터(US Center for World Mission) 주변의 몇 개의 선교단체와 개인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사역 발전을 위해 조직을 만들려고 하는데 도움을 요청하여 왔다. 얼떨결에 이 일의 한 모퉁이를 책임지게 되고, 모임의 facilitator로써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2007년 주재지를 말레시아로 옮기면서 다음해 초에 아시아 전방개척 선교운동협의체(Asian Frontier Mission Initiative, AFMI)를 쿠알라룸풀에서 조직할 때에 참여하여 섬겼다. AFMI를 중심으로 여러가지 사역을 추진하다가 2012년 은퇴하여 40여 년을 동역하고있는 대구 동신교회의 원로 선교사로 추대되었다. 건강 문제로 2015년 귀국 할 때까지 전방개척 선교운동과 지도자 양성 사역으로 말레시아를 중심으로 주로 아시아 지역을 순회하며 섬겼다.
주재지를 옮기면서 나의 선교 신학과 전략에 급격한 패러다임 전환이(Paradigm Shift)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주로 전방개척 선교에 초점을 두고 국제적인 모임이나 연구에 참여 하거나 말레시아와 아시아의 무슬림과 주요 종교의 현장으로부터 오는 도전에서 동기를 부여 받았다. 새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AFMI 운동에 다양한 사역들을 개발하여 연구와 함께 새로운 전략을 개발하는데 참여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겪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도사 역할을 하면서 동료들에게 호소도하고 격려도 하였다.
새 패러다임은 신학적 관점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복음주의자 관점에서 구령사업, 즉 전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던 사역은 자연히 교회를 개척하고, 그 교회가 성장하는데 보람을 가지는 쪽으로 출발하면서 나의 선교사역은 시작되었다. 즉 교회중심 선교신학 패러다임이었다. 선교보고도 전도와 교회였다. 모든 사역이 구령과 교회개척에 집중되었다. 구제와 교육도 전도에 연결되고, 의료와 각종 문화사역도 교회개척과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교회당까지도 교회와 직결되어 있었다. 교회 없이는 선교도 없었다. 선교사역 비용은 곧 교회 개척비용을 의미하였다.
이런 교회는 크리스탠덤 형의 교회이다. 교회란 용어도 에클레시아를 큐리아케 (주님의 것을 잘못 번역하여 “교회” (Church)로 하였다. Church를 추적해보면 소위 교회 설립의 원리로 받아드려지고 있는 삼자정책(Three-self Principles)도 이 크리스탠덤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에클레시아에는 Self-support의 개념이 없다. 선교의 새로운 물결은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쪽으로 흐르고 있다. 4복음서를 보아도 교회란 용어는 딱 2회 사용 되었을 뿐이나, 하나님의 나라, 혹은 주님의 나라란 말은 100회 가까이 사용되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기 원하셔서 인간이 되시어 오셨다.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우는 거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룩하는 사역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선교사는 그 분 나라의 일꾼이요,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교회개척”이란 말은 혼란을 가져오는 용어다. 주님께서만 에클레시아를 세우시는 분이다 (마 16:18). 선교사의 역할은 복음 전파이고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사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는데 있다. “교회개척” 보다는 “하나님 나라 확장”이 더 적절한 용어다. 이미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가는데 전념해야 한다. 이 나라를 위해 마태는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 (28:19)” 했고, 누가는 “증인이 되라(24:48)”고 하였으며, 마가는 “복음을 전파하라 (16:15)”고하셨으며,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 같이 예수께서 우리를 보내신다 (20:21)”고 하셨다. 이렇게 내 신학적 패러다임은 많이도 변했다.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하는 주님께서 하신 사역의 주제도 이 땅에 그리스도의 왕국(Christendom)을 건설하시려는 의도보다는 변화(Transformation)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복음서에 소개된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이 땅에 주님께서 왕이 되어 통치하시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요 18:36), 예수의 제자들 삶이 예수를 닮아 변하고 사회의 부분이라도 예수 중심의 사회로의 변화이다. 그런 왕국을 주님께서는 의미하셨다. 주님의 설교 내용이 변화이고 행하신 이적의 결과도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선교의 성과는 단순한 개종보다는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Transformation)되는데 포커스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이 변했다. 그러므로 선교 전략도 선교신학에 맞춰야 한다.
예를 들면, 전방개척 사역에서 전통적인 교회(Christendom)를 고집하는 전략은 삼가고, 내부자들(Insiders)이 스스로 교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도록 선교사는 촉매자(Cartarsyst) 역할을 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이해도 선교사의 관점보다는 선교지 하나님 백성들의 동행자(Alongsider)로서 Ethno-hermetics의 촉매자와 격려자 역할로 만족해야 한다. 전략의 원리로서 상황화(Contextualization)에 익숙해야 한다. 동시에 현장을 잘 이해하도록 최대한 자신을 토착화 (Indigenous) 성육신화(Incarnate)해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는 사역의 내용을 일신하였고, 선교를 이해하는 폭도 완전히 달라졌다. 너무 앞선 생각에서 성령님의 위치를 잊어 버리거나, 성경적인 원리를 무시한 점이 없을까 두려운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이런 관점에서 나의 일생을 돌아볼 때에 너무 철 없고 고집스런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씁쓸한 실패감과 좌절감 때문에 후배들 앞에 서기도 어렵고, 동역자들에게 선교를 말하는 것도 부끄러울 뿐이다.
각주
- 1김활란은 IMC 예루살렘 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여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이화여대 총장으로 학생들을 동원해서 파키스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조동진은 선교학을 공부하고 와서 본격적인 선교운동을 일으키고 선교 단체를 조직하고 많은 선교사를 훈련하여 파송하였다. 김준곤은 대학생들을 선교로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전도의 불을 한국교회에 붙였다. 김의환은 직접 선교사로 지원하였지만 비자 거절로 포기하고 교수로 학생들을 선교 동원하였다. 김창인, 김창렴은 지교회 목사로 교회를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의 영향은 현대 한국교회 선교운동에 지대하였다. 총신대학 안에는 Student Missionary Fellowship 같은 동아리가 생겨서 선교사 자원이 힘차게 자라고 있었다. 이들이 현대 한국 선교운동에 기둥들이 되었다.
- 2GMS 는 지역별로는 그간 최대 다수의 선교사를 남방 산호섬에 파송하여 왔다. 1980년대 초반에 교단 집중 선교지로 결정하고 다수의 선교자원을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2016년 현재도 파송 숫자가 중국에 (222 units) 이어 필리핀(102 units)은 두 번째 많다. (2016 GMS 선교사 백서, 18-19)
- 3Asian은 Asian에 의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할 수 있다면 같은 문화권에 속한 자들이 책임을 지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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