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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GMS) 선교 100년사와 미래적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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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GMS) 선교 100년사와 미래적 전망 » 기고: 김활영 원로선교사 (장양백 사모) »

Ⅰ. 들어가는 말

초기 선교사(宣敎史)인 사도행전은 복합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취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1성령의 특별하신 간섭 즉 오순절 사건이라든가, 에티오피아 내시, 고넬료, 유럽선교 개시, 또는 특정 선교 대상 (Strategic Centers, People, Geographic) 혹은 전략적 대상(회당중심, 도시중심) 이나 사역 내용(전도, 양육,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두기도 하였다. 두 가지 현저한 측면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선교의 주체인 선교사(宣敎師)와 대상인 선교지(족속)이다. 한 면은 선교주체인 선교사(宣敎師) (베드로, 빌립, 바울)와 이들 선교 주체의 조직에 (예를 들면 팀조직 13: 15:39, 16:1~10) 관심을 두고 서술하여 갔다. 다른 면은 1장 8절 지상명령에 언급한 대로 대상을 강조하여 지리적 차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로 이어 땅 끝까지, 혹은 문화적 종족적 원근(유대인으로 시작하여 사마리아인과 헬라인)에 순서를 잡고 선교사(宣敎史)를 기술하였다. 2Ralph Winter나 Peter Wagner같은 선교학자들은 편의상 선교 대상을 중심으로 예루살렘(E-0, 동일 문화권 혹은 명목상 신자), 유다(E-1, 동일 문화권), 사마리아 (E-2, 이웃 문화)와 땅 끝(E-3, 다른 문화권)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시대적인 차서를 무시한 것은 아니나 대상에 무게를 두고 선교사(宣敎師)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기술하여 갔다. 필자도 GMS사역의 한 세기를 돌이켜 볼 때에 누가를 모방하여 사도행전 패턴을 따라 GMS의 100년 선교사(宣敎史)를 정리하여 보려고 한다.3 한국교회 선교사 시대구분에서, 박기호 선교사는 학위 논문에서 일본 통치 시기와 교단 분열을(합동과 통합) 중심으로 나누었다. 즉 1907년 첫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던 때부터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던 때까지를 제 1기로, 다음으로는 1956년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그 선교사들이 태국을 떠나던 1975년까지를 제 2기로, 그리고 합동측과 통합특이 분열하던 1959이후 합동 측에서 1967년 대만에 선교사를 시작하던 때를 기점으로 하여 제 3기 혹은 현대선교라고 구분하였다. 한편 신홍식 선교사는 태국에서 회집한 선교대회에서, 태국선교로 시작된 현대 선교사를 10년 단위로 세분하여, 시작 전의 암흑기(1945-1955), 여명기(1955-1965), 태동기(1965-1975), 진흥기(1985-1995)로 나누었다.

그러므로 기술의 차서를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서구 선교사(宣敎師)가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발을 드려놓기 이전, 그러니까 한인(韓人)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던 1876년을 기점으로 한민족(韓民族)에게는 예루살렘이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韓半島) 안에 전개된 선교사역을 ‘예루살렘 선교’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한반도(韓半島)밖에 있는 韓民族을 향한 선교를 GMS의 ‘유대선교’라고 명명하고 그 첫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던 1907년 이후로 잡는다. GMS의 ‘사마리아 선교’는 이웃 민족인 중국 선교를 결정하던 1912년을 출발점으로 잡고, 마지막으로 ‘땅 끝까지 선교’는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던 1955년 총회를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의 선교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기에 고려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교단의 형성사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선교의 출발과 유대 선교 시작 사이에 장로교 공의회가 소집되어 전도위원회를 조직하여 한반도(韓半島) 안팎을 대상으로 선교를 담당케 하였던 시점(1901년)부터는 딱 한 세기가 흘렀다. 이 전도 위원회는 오늘의 GMS의 전신이었다. 그러므로 총회 선교 100년 역사라고 할 때에 전도위원회가 공식으로 활동을 시작하던 때를 기준 하여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1970년대는 GMS역사에서나 한국교회, 아니 나아가서 세계 선교 역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GMS의 선교 세력은 가히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였으며, 세계 선교의 축이 서구에서 비서구, 아니 세계 교회로 옮겨가기 시작한때였다. GMS의 선교 대상도 유대에서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이때부터는 GMS의 현대선교 시기로 분류하고 다르게 취급하려고 한다. 즉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의 선교를 시대를 따라 서술하면서 현대 선교를 주로 초문화 사역(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선교)에 초점을 맞혀 보려고 한다. 사역을 역사적 사건중심으로 기술하면서 선교의 중요한 이슈에 대하여서도 언급을 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향후 전개될 GMS의 사역을 전망하여 본다.

Ⅱ. 民族的(韓半島)을 향한 예루살렘 선교

“때가 차매” 우리 민족에게 천국 복음이 전해진 때는 조선조(朝鮮朝)가 저물어가던 19세기 후반이었다. 1976년 만주 땅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John McIntire가 네 명의 한인(韓人)청년들,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로써 동방의 은자(隱者), 한민족(韓民族)에게 복음의 불길이 당겨졌다. 이로부터 한반도(韓半島)에 요원의 불길같이 번져나간 십자가의 도가 건강한 선교교회를 탄생시켰다. 4물론 한 세기를 앞서 천주교회가 북경을 거쳐서 한인에 의하여 전파되어 활발한 전도와 성장이 박해와 순교의 와중에서도 이루어져 천주교회는 존재하고 있었다. 구츨라프나 토마스 같은 선교사에 의하여 복음의 소개나 스쳐지나가듯 하여 개신 교회가 전하여 졌다고 할 수 있으나 교회가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세계 선교역사에 흔치않은 사도행전적인 교회가 배태(胚胎)되고 태어나, 성장하면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여왔다.

1883년 이성하를 필두로 백홍준, 서상륜 등 성경5만주에서 개종한 한인 청년들의 도움으로 스코트랜드 장로교 선교부의 John Ross는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고 1882년에 심양에서 출판하였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처음으로 선보인 한글 성경이었다.을 가슴에 품은 한인(韓人)사도들이 비밀리에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모국으로 스며들게 되고 친지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백홍준은 그 후에 첫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서상륜은 친척의 향리인 황해도 소래로 가서 교회를 시작하였으니(1884), 이는 한번도(韓半島)안에서 한국어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최초의 개신 교회였다. 이처럼 복음은 먼저 한반도의 북쪽을 통하여 들어 왔다. 한편 한반도의 동쪽 일본 땅에 유학을 떠났던 이수정이 예수를 믿고 번역한 복음서가 1885년 정초에 동경주재 미국 성서공회가 6000부를 출판하였다. 그 해에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발을 디딘 서양의 장로교 첫 목사 선교사인 Underwood의 손에는 동경에서 얻은 한글 성경 수천부가 들려 있었다. 이렇듯 한반도(韓半島)의 한민족(韓民族)을 향한 예루살렘 선교는, 한인(韓人)들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번역하고, 모국으로 복음을 들여와서 생명을 건 전도가 진척되었다. 복음의 씨는 뿌려지고 싹이나 자라서 드디어 열매 맺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서구 선교사들이 때맞춰 도착하였다.6Underwood를 뒤따라서 호주에서 Davies 남매(1889년), 남장로교 선교부의 Tate (1892년),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McKenzie (1894년) 등이 공식 선교사로 속속 입국하여 본격적인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 서구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어린 교회의 예루살렘 선교는 본격화되었다. 선교사들의 현명한 지도와 먼지 제자가 된 한인(韓人)사도들의 헌신으로 한민족(韓民族)교회의 선교는 성장을 거듭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처럼(행6장) 한민족(韓民族)교회도 조직되었다. 황해도 소래에 ‘한국 기독교의 요람’이라고 할 교회가 시작되고(1884), 서울에서는 신문내교회가 처음으로 당회를 조직하였고(1897), 드디어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독립 노회로 조직될 때는(1907) 이미 25개처의 조직 교회, 1022개처의 미조직 교회에다, 6만의 신도를 가진 왕성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데는 능력있는 복음이 전파되었고, 따라서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가며, 핍박과 순교가 따르는 결단이 있는 사도행전적인 복음의 드라마가 한반도 구석구석에서 펼쳐진 결과였다. 예루살렘의 처음 제자들처럼, 한민족(韓民族)의 제자들 역시 집에 있든지 거리에 있든지 예수가 구주임을 전파하는데 쉬지 않았던 열매이었다.

민족(民族)교회가 탄생하여 성장하여 오던 시기는 우리 민족사(民族史)에서 가장 암울하던 때였다. 정치적으로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을 잃었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수탈과 착취로 말미암아 한반도(韓半島)는 사람 살 곳이 못되어 대민족이동이 시작되었으며, 사상적으로 구심력을 잃고 방황하는 민족으로 전락하여 갔다. 이러한 때에 천국 복음은 가뭄에 단비였으며, 흑암의 밤중에 빛이었다. 그 결과 민족적 대 수난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교육제도와 병원을 통한 전도, 사경회와 문서사역 중심의 신앙의 심화, 영웅적인 교회지도자의 양성, 성령의 폭발적 부흥은 한민족(韓民族)의 예루살렘 선교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선교에 못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선교사들의 뜨거운 선교정신과, 냉철하게 적용한 선교정책들도 주효하였다. 여느 선교지마다 경험하였지만 선교지 분한(Mission Comity)과 같은 정책은 선교자원의 불필요한 중복과 낭비를 막았으며, 네비우스 정책도 또 하나의 성공적인 모델을 세계 선교사에 추가하였다. 신생교회의 예루살렘 선교는 1907년대를 중심으로 오순절 때와 같은 성령의 폭발적인 부흥의 경험과 日帝의 잔인한 핍박의 발굽아래 뿌려진 수많은 순교자의 피와, 공산주의의 철저한 말살정책과 왕성하였던 북쪽의 교회가 남쪽으로 대이동, 6․25와 한반도의 초토와, 교회분열의 아픈 상처, 군사정권과 경제 부흥, 최근의 숨가쁜 세계화의 소용돌이,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힘차게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제는 새 천년 세계 복음화의 주역으로 주목받는 선교세력으로 성장하였다.7합동측은 세계 장로교단 중 미국의 PC(USA) 다음으로 많은 세례교인을 보유하고 있다.

Ⅲ. 흩어진 교포를 향한 유대 선교

바울은 새 선교지마다 먼저 회당을 찾아서 복음 전파의 접촉점 혹은 거점으로 삼았다. 문화적 측면에서 유대선교라 할 수 있는 교포선교가 바울에게는 중요한 전략이었다. GMS도 유대선교 즉 교포선교를 처음부터 중요한 전략으로 삼았다. 민족사상 가장 어려운 때였던 1905년에서 1945년 사이에 한민족(韓民族)의 삼분의 일이 한반도(韓半島)를 떠나 방황하고 있었고 8조동진 박사는 민족수난기였던 1905년에서 해방 시까지 40년 동안에 당시 전체 한민족의 삼분의 일 이상이 한 반도를 떠났다고 하였다. 주로 만주(500만)와 일본(200만)으로 떠밀려갔으며, 한반도 안은 마치 애굽과 바벨론 포로 시절과 같았기 때문에 유례가 없었던 이 대 민족 이동 사건을 한민족의 출애굽으로 비유하였다. 이들을 위해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였다.9 총회록과 기타 관련된 각종 문헌들에 나타나는 GMS 파송 선교사(혹은 전도목사)들은 145명 이상 되며 이들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활동 하였다. 해방 후에도 GMS는 계속하여 한반도 밖의 동족을 향한 뜨거운 선교 열정을 불태워 왔다. 1970년대 이후 이민의 물결을 따라 지구촌 구석까지 선교사들을 보내었고, 개척된 교회들은 이방민족 선교의 거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의 중요 도시마다 한인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일곱 명의 목사를 처음으로 안수하고 독립노회를 조직하여(1907) 장로교 공의회로부터 지도력을 이양받은 교회는 GMS의 전신인 “전도국”을 조직10 전도국은 공의회 시절의 전도 위원회를 게승하였으며, 길선주 목사와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하므로 GMS가 공식으로 출범을 했다. 첫 사업으로 일곱 목사 중 이기풍을 첫 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하였으며, 전국교회가 헌금과 기도로 참여하였다. 목사뿐 아니고 여전도사 이광선과 평신도 조력자로 김형재, 김창문, 김홍련도 제주 선교사의 명단에 들어있다. 핍박과 표적이 동시에 따랐던 제주선교는 GMS의 상징적인 유대선교의 출발이요 공을 들였던 선교지였다.

GMS의 일본선교는 마케도니아 부름의 응답으로 출발을 하였다. 동경 유학생 중에서 YMCA에 관련자들이 본국 교회로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GMS는 한석진을 삼개월 단기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박영일, 임종순 장로가 계승을 하고 드디어 학생선교범위를 넘어 교민전체를 상대로 전도가 진행되었으며, 감리교회와 협약하여(1912) 공동사역을 추진하였다. 후에는(1927) 성결교회도 참여함으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가 연합 선교전선을 구축하여 1934년에는 “在日 大韓 基督敎團” 조직하기까지 하였다. GMS는 해방 될 때까지 14명 이상의 공식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11 그들 중에는 김이곤(1922), 오택환(1926), 박병훈(1940), 김길창(1929), 김치선(1936), 배신환 등도 포함되어 있다. 해방 이후에는 공식 파송이 아닐지라도 장로교 목사들이 이 교단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GMS가 김형탁과 백병수(1974)등을 이 교단으로 파송한 이후 현재까지 수십 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사역하고 있다.121980년대에는 이성우(1983) 외 14가정, 그리고 1990년대에는 21가정을, 그리고 2000년대에 와서는 3가정을 파송하였다. 대부분이 교포선교사들로 재일 기독교단과 기타 군소 교단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근래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을 상대하여 교회 개척사역을 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이성우(1983) 외 14가정, 그리고 1990년대는 21가정을, 그리고 2000년대에 와서는 3가정을 파송하였다. 대부분이 교포선교사들로 재일 기독교단과 기타 군소 교단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근래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을 상대하여 교회 개척사역을 하고 있다.

GMS의 유대선교는 러시아에도 확장되었다. 첫 선교사 최관홀을 블라디보스톡에 파송하던 때에(1909년) 시베리아지역에 교포가 이십만이 넘었다. 그 다음해에 한병직을 해삼위로 증파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선교는 오늘날처럼 정교회의 방해에 부딪혀서 어려움을 겪었다.13최관홀은 박해에 못 견디고 정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러자 그를 GMS는 파면을 하였다. 그 후에 모교회로 다시 돌아 왔지만 배후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본부에서는 김형찬과 주한 캐나다 선교사 Foot를 파송하여 시베리아 사역을 계속하였고, 그 후에도 박창연(1922년), 최홍종(1880~1966), 오순형, 그리고 여전도사도 파송하였으며, 1922년에는 독립노회까지 조직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소수 민족정책의 여파로 수십만의 교포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고 사역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GMS는 함경노회와 주한 캐나다 선교부에 책임을 맡겨 애를 썼다. 그 노력도 공산당의 종교 말살 정책으로 엄청난 핍박이 따르자 사역은 지하로 잦아들게된다. 그 후 반세기 동안 어두운 시기를 지나 개혁개방정책으로 러시아 땅에 해빙기가 찾아왔을 때, 즉 1990년대 초부터 GMS도 옛 선교지에 조심스레 선교사들을 잠입시켰다. 먼저는 옛 일본 치하에서 끌려간 동포들이 많이 남아있는 사할린에 다수의 선교사가 투입되었다. 러시아의 극동지역을 위시하여 구 소련 연방의 독립국가들에14우즈베키스탄을 위시하여, 카자크스탄, 타지크스탄, 키르키즈스탄과 같은 신생 국가들이다. 다투어 들어온 선교사 팀에 GMS도 앞장을 섰다.15러시아에 1990년 이후 43가정을 파송하였고 그 중에 절반 이상이 주로 교포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였고, 이들 교포들의 통역과 협조로 러시아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있다. 자유를 얻은 정교회가 사역을 방해하여 비자 등 활동에 제한이 있었지만, 옛 장로교회의 흔적을 찾아서 정부에 교단으로 등록을 하는 등 발빠른 대처도 하여 왔다. 대상이 몇 대를 걸쳐 고국을 떠난 동포들인지라 통역자가 필요할 만큼 문화적이 차이가 많은 유대선교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지 교회나 노회 혹은 몇몇 동지들의 후원을 받아 선교지로 먼저 뛰어 들었다가 나중에 GMS로 가입하는 선교사도 적지 아니하였다.

만주 선교는 GMS의 유대선교 중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가장 오랜된 사역이다. 고구려의 고도(古都)였던 이양자에 1884년에 벌써 75명이나 세례교인이 있었던 기록이 있다. 수천 년동안 만주는 한민족(韓民族)의 영토였다. 고조선 이후 고구려와 발해시절은 한민족(韓民族)에 의하여 다스려진 고토(故土), 이웃에 있는 옛 조상들의 땅으로 주권을 잃은 수백만의 한인(韓人)들이 몰려간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1902년 중국 주재 스코틀랜드 선교부가 만주의 한국교회 선교권에 대해 문의하였 왔을 때에 GMS(공의회 전도 위원회)는 당연히 우리의 책임이라고 답했고 1901년에서 1945년 사이 GMS는 백명 이상의 공식적인 선교사를 만주 땅에 파송하였다. 그 결과 6개의 노회가 조직되고 1941년에는 모국과는 독립된 총회까지 조직하였고 만주 땅에 평양신학교를 대신하는 신학교까지 운영하였다. 지역도 나누어 남부는 인접한 평안도 교회와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동만주 즉 간도지역은 함경도 교회와 캐나다 장로교선교부가 책임을 졌다. 2차대전 후 일본이 만주에서 물러가고 공산권이 들어서므로 지역교회는 대거 귀국의 길에도 올랐고16이때에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자 만주로 피난을 가서 신학교육을 하고 있던 박형룡, 박윤선도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와 나중에 평양신학교의 후신인 총신에서 교수하게 된다. 나머지는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처럼 등소평이 개방정책을 들고나올 때까지는 엄격하게 복음이 금지되었다. 개방정책 이후 지하교회는 더욱 활발한 부흥의 일로에 있었고, 1990년대 초에 GMS가 다시 잠입하였을 때는 이들 지하교회를 대상으로 지도자 양육사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대 중국선교에서 GMS는 다른 많은 한국교회와 같이 만주지방을 일차적인 목표지점으로 삼았다.

중국 본토를 향한 유대선교도 초기부터 활발하였다. 당시에 주변 여러 곳으로 흩어져간 교포들 중에 적지 않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어서 곽안련의 표현대로 “교회를 들고 가서”(have taken their churches with them) 대도시마다 교회를 자발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들에게 GMS는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다 응해 주지는 못하였지만 중국 여러 곳에서 교역자 파송 요청을 해왔다. 거대한 대륙으로 흩어져간 한민족의 이민 물결이 2차대전후 다시 철수할 때까지 활발한 사역이 진행되어 1940년대는 북경, 천진, 소주, 청도, 제남, 무한 등 제도시들을 중심으로 교포 노회들이 탄생했다. 2차대전후 동포들의 대거 귀항과 공산정권이 국민당을 몰아내어 중원을 장악하므로 선교사도 교회도 철수하였던 소강시기를 지나서, 1970년대에 다시 개방정책을 타고 지하에서 성장한 수많은 교회들이 선교사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 때 GMS는 다수의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는 한민족(韓民族)보다는 한족(漢族)쪽의 요청이 더욱 컸다.

세계인들의 약속의 땅인 신대륙 향하여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흩어져간 한민족(韓民族)을 위시하여 역사의 뒤안길에서 갖가지 이유로 한반도(韓半島)밖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교포들을17통계상으론 7000만을 헤아린다는 한민족 중 10%는 해외교포들로 한반도 밖의 지구촌에 흩어져 살고 있다. 다양한 목적으로 잠시 거주하는 교포들을 포함하며 숫자는 증가한다. 향한 선교는 GMS의 중요한 정책이었다. 초기에는 이들 가운데 선교사 신분으로 사역자를 파송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포가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전도목사와 같은 신분으로도 파송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교포 선교사역을 초문화 선교와 구별할 필요가 점차 생겨났다. 특별히 북미에 이민이 급증하여 노회와 독립된 총회까지 조직하였으며, 초문화 사역을 하던 선교사들이 이들 이민 사회에 더러 정착하여 사역을 하게 됨으로 GMS는 이곳에 사역하는 자는 선교사의 명부에서 빼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위시하여 유럽에 이르기까지 흩어진 교포들을 아직도 유대 선교지로 간주하여 선교사를 계속하여 파송하고 있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선교사의 대부분이 유대선교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초문화 선교사가 교포선교사보다 상대적으로 급증하였다. 동시에 상당수 교포 선교사는 재정적으로 독립하여 교포교회를 중심으로 현지인 선교, 곧 초문화 사역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즉 옛날 회당이 감당하던 주변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센터 역할을 계승하고 있는 교회들이 많다.

Ⅳ. 이웃을 향한 사마리아선교

GMS는 사마리아 선교는 중국에서 시작하였다. 1907년 독립노회 조직시 유대선교를 시작한 것같이 1912년 총회가 조직되면서 그 감격을 사마리아 선교로 표현한 것이다. GMS가 선교사 파송을 결정하던 그 해는 바로 만주족의 대청제국이 무너지고, 현대 중국의 새 공화국이 손문(孫文)을 대통령으로 장을 열면서 바야흐로 중국선교의 황금기가 시작하던 때였다.18 중국 네 번의 선교 기회가 있었다. 제1기(635-900?)눈 당대에 Nestorian 선교사 Alopen에 의해서고, 제2기 (1245-1368)는 몽고 제국시대로 문을 연 선교사는 Franciscan 의 John of Plano Carpini 였다. 제3기 (1583-1774)에는 Jesuit Society가 활약하고 Xavier이 중국 땅에 상륙하였고 Mateo Ricci가 본격적으로 활약하였으나, Clement XIV가 Jesuit Society를 폐쇄함으로 자연 철수되었다. 마지막 기회(1802- )는 개신교에게도 왔다. Morrison이후 다수의 선교 단체들이 입국하였다. 모택동이 중원을 장악함으로 잠시 공식적으로 문이 닫혔으나 안에서는 외부 선교사가 없이 중국교회 스스로 활발하게 선교하였다. 선교지는 공맹(孔孟)의 고향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 땅 산동성이었다. 이 산동 선교는 GMS의 본격적인 초문화 선교의 출발이었다. 창립총회 석상에서 황해노회의 박태로목사가 후보로 선임되었다. GMS위원들이 현장답사를 하고 현지교회와 주재하고있던 서구 선교단체와 협의를 거쳐 來陽縣을 사역지로 확정하였다.19오지 전도국의 위원장은 길선주였다. 위원 김찬성과 박태로, 그리고 William Hunt는 북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현지 교회와 산동주재 미국 장로교 선교와 협의로 내양이 결정되었다. 1913년 11월에 추가로 선임된 김영훈, 사병순목사와 함께 박태로는 가족을 대동하고 제물포를 떠나 선교지로 향했다. 감격으로 시작하여 많은 수고로 터를 닦고 있던 산동선교부는 한 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박태로는 질병으로 사망하고, 나머지는 본부와 충분한 연락이 없는 상태에서 철수하고 말았다(1917).

선교본부는 이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방효원을 파견하였으며, 총회는 철수한 선교사를 이어 방효원과 홍승한을 파송하였다(1918). 선교사들은 내양현 南關에 본부를 두고 사역을 시작하는데, 이듬해에 박상순이 참여하여 제2기 팀이 구성되었다. 제2기부터 본격적인 산동선교 사역이 시작된다. 방효원은 팀장의 역할을 잘 하였다. 홍승한이 바나바와 같은 지도자였으면 방효원은 바울같은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 1922년 평북 여전도회 연합회의 지원으로 이대영이 파송되어 오자 산동선교부는 내양현의 서남부에 위치한 즉묵에 새 지부를 열고 홍승한과 팀을 이루게 하였다. 박상순은 교육과 행정에 뛰어난 은사를 보였다. 그는 선교사 자녀 학교를 열었고, 후에 성경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대영은 뛰어난 지도자였고 능력있는 부흥사였다. 홍승한은 한 텀을 마치고 선교비의 어려움으로 총회 선교부가 선교사 2명 소환을 결정하였을 때에(1924년) 귀국하였다. 그때에 김윤식(1918년)이 의사로서 내양에 와서 개업하고 협동 선교사가 되어 선교사를 돕기 시작하였고 그를 이어 주현측(1923년), 안중호(1931년) 등도 의료 선교사로 동역하기 시작하는가 하면 대구에서 파송되어온 조소임(1922년), 이영애(1924년), 편순남(1930년) 등은 선교사 자녀학교의 교사 선교사로 봉사하게 된다.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여성을 위하여 김순호를 후원하여 총회가 파송(1931년)하니, 처음의 독신여성 초문화 선교사였다. 이 시기는 산동선교의 전성기였다. 한국 선교사들의 활동에 감동한 중국교회와 북장로교 선교부 140만 인구를 포용하는 내양현 전체를 한국 선교부로 이양하였다. 나아가 이웃에 있는 해양현(海洋縣)의 일부까지 선교지로 편입하였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1933년에는 한국 선교사들의 사역지에 내양노회를 조직하는데 까지 발전하는가 하면, 교회가 20여처, 기도처가 30여처로 늘어났고, 세례교인이 1,000명을 넘어서고, 10여개의 학교도 운영하였다. 한국식 사경회와 송상절, 김익두, 등 초청강사와 이대영이 인도하는 부흥회가 성행하였으며, 쾌자(快子)를 통한 성경 읽기 운동, 화동 성경학교에서 지도자 양성, 십일조 헌금장려 등으로 선교지 교회가 한국교회처럼 든든하여 갔다.

그러나 1936년 개척자 방효원이 은퇴를 하고, 이듬해에 그의 아들이 계승하면서 대륙에는 대동아 전쟁의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여 선교부는 수난의 시기를 맞이한다. 김순호는 만주로 선교지를 옮긴다(1938년). 이제부터는 신임 2세 선교사와 박상순, 이대영으로 구성된 제 3기의 산동선교팀의 마지막 3총사에게는 가장 험난한 선교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지일은 초기부터 전쟁으로 선교지인 내양에 부임하여 보지도 못한 채 일시 철수를 하였다. 결국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내양을 내어 주고 청도(靑島)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박상순도 전쟁통에 내양으로 내왕을 하다가 결국은 귀국(1940)하게 된다. 이대영은 즉묵(卽黙)을 중심으로 장개석이 대만으로 옮겨오던 1948년 귀국하였다가 가족을 둔 채 영영 귀임하지 못하고 만다. 방지일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시작되던 때까지 선교지를 지켰다. 아마도 공산당에게 좇겨난 최후의 선교사였을 것이다. 방지일은 20년을 난리통에 시간을 보내면서도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자를 양성하며 전쟁난민소와 먹이고 입히는 일이며, 핍박 중의 교회를 지키며, 격려하면서 꿋꿋이 버텼다. 1957년 9월 방지일이 부산에 상륙함으로 우리 교회의 사마리아 선교 첫 막이 내려지고 말았다.

산동선교가 문이 닫히면서 다시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대만선교가 시작하였다. 1956년 GMS는 공산치하 산동에서 사역하고 있는 방지일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대만에 선교사를 보내어 장차 산동에서 사역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래서 피택된 계화삼은 항상 자신을 산동에 들어갈 대기선교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만주에서 자라고 신학을 한 계화삼은 먼저 교민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개석과 함께 본토에서 피난 온 정성원 전도사가 1949년 이후 길륭과 교웅에 한인(韓人)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일에 산동에서 피난 온 화동 성경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피난민교회를 시작하였다가 알젠틴으로 사역지를 옯겼다(1969). 채은수가 그를 계승하였으나 단기간의 사역에 그쳤다(1967~1971).

사마리아 선교 중에 산동선교는 GMS 100년사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최초의 초문화 사역이었으며, 구조적인 면에서 교단선교의 좋은 모델이었으며, 현장에서도 독자적 사역이 아닌 현지교회와 서구 선교회와 협력 사역이었으며, 뛰어난 선교사들이 선발 파송되었다는 점과 평신도들도 다수 참여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Ⅴ. 모든 족속을 향한 땅끝 선교

1954년 Kuala Lumpur에서 동아시아 교회 협의회 (EACC) 모임에서 태국에 아시아 선교사 파송을 권유하는 기회가 있었다. 참석하였던 한국 대표단은 도전을 받고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작정하였다. 다음해 GMS는 최찬영과 김순권을 선교사 후보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동란이 휩쓸고 자리에 남겨진 여러 상황은 여권을 내는 일 조차 어려웠다. 결국은 김순권은 여권 발급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대신하여 김순일이 피택되었고, 1956년 5월과 11월 이들 두 가정이 방콕에 도착하였으니 한국교회의 또 하나의 새로운 선교, 즉 땅끝까지 선교가 출발하게 되었다.

영어, 중국어, 일어 등에 능통하였던 이들 엘리트 선교사들이 짧은 시간에 언어를 익히고 문화를 습득하여 능력 있게 사역하도록 잘 배치도 하여 주었다. 최찬영은 방콕의 교회와 병원에서, 김순일은 Chiang Mai의 지역교회에서 각각 임무를 맡았다. 최찬영은 성서공회 사역에 집중하여 후일 마닐라와 홍콩을 무대로 아시아 지역의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김순일(1956~1976)은 최전방의 야전병으로 넓은 선교지의 밀림과 동리들을 배경으로 뛰었다. 그는 곧 서구 선교사에 뛰어 넘는 신뢰를 태국성도들로부터 받았고 즉시 노회장으로 피택되어 분주하게 순방에 젊음을 불 태웠다. Princeton에서 연구하였고 Fuller를 통해 제1호 한국 선교학 박사가 되었다. 태국 교단신학교에서 교수를 하다가 아시아와 세계에 선교지도자로 발돋음을 하면서 Fuller에서 교수하였다. 이런 선교사들로 한국교회의 태국선교는 참으로 화려한 출발을 하였고 대내외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성공적인 사역을 하였다. 태국교회에서 반응은 지금까지도 비서구교회로는 가장 훌륭한 선교교회란 인상을 깊이 심어주었고 서구 선교사들에게도 한국 선교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GMS는 먼 나라, 땅끝까지 흩어진 여러 족속들을 향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조동진은 선교 훈련원을 세워 선교사를 양성할 뿐 아니라 서구식 초교파 선교단체(Korea International Mission)를 설립하여 선교사(김순일도 여기에 속했고, 윤두혁 신홍식 등)를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60년대는 현대 한국선교의 태동기(胎動期)로 접어들었다. 이때까지도 GMS는 아직 우리의 유대와 사마리아에 해당되는 교포 선교와 대만과 일본선교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점차 유대와 사마리아를 지나서 땅 끝에서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여 복음의 빚을 갚으려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잉태되어 자라가고 있었다.

특히 GMS가 수적인 면이나 시기적으로 타 교단이나 선교단체보다 선교에 앞서게 된 것은 현대 한국선교에 앞장선 지도자들이 교단 소속인 점과(조동진, 김준곤, 김의환 등), 총신에서 학생선교 운동이 먼저 일어난 것도 한 몫을 했다. 그리고 교단의 보수신학이 선교신학에 끼친 영향, 교회의 급성장, 많은 신학생이 일어난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Ⅵ. 현대 선교 30년

GMS의 현대선교시대라 할 수 있는 지난 30년은 세계선교에 있어서도 격변기였다.20랄프 윈터는 1980년 에딘버르 선교대회에서 현대 선교 200년을 3시대로 구분하고 1기나 2기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활약하던 시기이나 3기에 해당되는 2차대전 전후부터 지금까지는 비서구 선교사 시대가 괼 것을 내다보았다. 선교전도 세계전선도 세계전역 즉 모든 족속으로 뻗어나갈 것을 예상하고 숨겨진 족속에 집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새 천년을 마지한 지금은 복음적인 신자들이 비서구가 서구보다 훨씬 많아 졌으며, 비서구 선교사가 서구 선교사의 수를 훨씬 능가하고 말았다. 1959년 교단분열후 1970년을 시작하면서 3가정만이 공식으로 GMS 소속선교사로 남아 있었으나, 30년 동안에 700가정이 90개국가로 파송되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211970년을 시작하면서 김순일(태국), 차남진(미국), 양승만(브라질) 세 분만이 GMS 선교사였다. 그런데 1980년까지 10년간 18가정을, 그리고 1990년까지는 120가정을 추가 파송하였고, 2000년 8월 31일자 통계에는 사임한 선교사까지 도합 700가정 110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가히 하나님의 특별 간섭이라 할 정도의 성장이었다. 이런 선교사 숫자 증가에 따르는 제반 선교환경의 변화와 발전 또한 괄목할 현상이다. 곧 제도가 발전되고 사역의 방안도 개발되었으며 지 교회들의 참여와 선교사들의 모습도 바뀌어져 갔다. 이러한 성장을 진단하여 보고, 그 변화와 발전을 10년을 주기로 살펴보자.

선교의 성장에 대한 Fuller의 Paul Pierson의 이론을 대입하여 보면, 이런 급성장의 배후에는 먼저 신적 요소로써 ’70년대에 일어난 교회의 급성장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의 연합된 장로교단 다음 가는 세계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교단으로 성장한 것이 주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급성장의 배후에는 보수 신학이 있었고 ’70년 초부터 총신을 중심으로 전개된 학생들의 선교운동은 현대선교 활성화의 못자리 역할을 한 셈이기도 하다.22 1970년 초반에 총신에서 일어난 학생선교 운동은 GMS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사당동 뒷산에서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던 소수의 학생들이 함께 모여서 전체 학생들에게 도전이 되기 시작하였다. 1974년에 CCC 강당에서 모였던 세미나는 총신에 선교의 불을 본격적으로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68회와 72회의 학생들이 상당수 앞장을 섰고 이들은 대부분 선교지로 먼저 나갔다. SMF을 위시하여 MMA등 학생선교단체들이 조직되어 선교의 열기를 가하였다. 그때 선교 운동에 앞장섰던 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GMS의 선임 선교사들이 되어있다.

다음으로 인적 요소로서 훌륭한 선교 지도자들의 영향을 무시 할 수 없다. 김활란, 조동진, 김준곤, 김의환 같은 지도자들이 현대 한국 선교의 지도자들인데 이들 중 세 분이 합동측 목사들이었다. 이들이 교단적, 전국적인 선교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면, 개 교회 목사로써 선교를 진흥하고 실제로 선교사를 파송한 목사들의 대표자들은 김창인, 김창렴 등이다. 선교사들 역시 현대 한국선교의 선임자들은 거의가 GMS 선교사들이고, 한국인 제1호 선교학 박사도, 그리고 현지사역 경력을 가진 자로 선교학 관련 학위소지자의 대부분도 GMS에 속해 있다.

세 번째로 선교를 활성화시킨 선교구조를 보면 교단의 교회 패턴에 걸맞았던 개 교회중심 선교체제였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개교회 선교사는 없었고 교단 선교사만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교단 선교부는 개교회의 열심을 좇아가지 못하였다. 교회 규모의 대소를 막론하고 자기 교회선교사를 파송하기를 열망한 ’80년대의 교단교회들은 저마다 파송하고 지원을 전담하는 자기 선교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국가적으로 전에 없었던 경제성장과, 올림픽 개최 등의 국제적인 지도력, 외교적 입지, 수많은 대학생의 증가는 대규모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적 요소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시킨 대형집회 등으로 한국 교회의 힘을 세계에 보여 주면서 선교 방면에서도 책임을 맡기 시작한 것을 들 수 있다. 선교 관련 국제적인 집회가 한국에서 모이기를 시작하고, 나아가서 그런 집회를 주도하기까지 한 것을 들 수 있다.23 1990년 Asia Missions Consultation이 충현교회에서 모였고, 1995년의 GCOWE도 충현과 사랑의교회 등에서 모였으며,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재정과 지도력으로 추진된 국제선교대회였다.

1970년대에 서만수(인도네시아)를 선도로 개 교회의 후원을 받은 선교사들이 일본, 이집트, 필리핀, 태국, 대만, 유럽과 남미로 개척하여 나갔다. 2~3명은 현지인 선교에 전념하기 시작하였으나 대부분 교포사역을 겸하거나 한인교회에 매달렸다. 한인교회를 통한 현지인 선교는 아직은 미진한 상태였다. ‘80년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후반부부터는 선교비 송금과 파송에 국가적인 제약이 없어졌다. 교포 선교사보다 초문화 선교사가 압도적으로 증가하였다. 심지어 교포선교는 약간 비정상적인 2류 선교사역으로까지 인식될 정도로 초문화 선교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GMS가 아프리카로 들어가면서 국제적인 선교기관의 협조를 받아서 동역하기 시작한다. AIM과 SIM은 중요한 국제 파트너였다. 그러나 아시아 쪽으로 다수의 선교사를 배치하였다. 필리핀은 집중 선교지로 자원을 많이 투입하였다. ’70년대 후반부터 수 차례 모였던 선교전략회의도 ‘80년대에는 선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파송교회들의 협력으로 소집되어 활발하게 반성하며 연구하는 선교로 가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대폭 증가함으로 파송하는 교회들이 협력하여 일종의 선교단체를 만들기도 하였다.24모든 민족 선교회, 필리핀 선교후원회, 형제 선교회, 태국선교후원회, 브라질 선교회등 수많은 선교 후원기관이 힘을 결집하는 팀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선교현장에서도 팀들이 구성되어 갔으며, 필리핀은 앞장을 서게 된다. 한편 GMS 본부도 교단의 구조 변화로 선교국이 생겨서 상설 선교사 관리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80년대 말에는 국장 한 사람 정도의 인력으로 개 교회 중심으로 파송된 수 백명 선교사를 관리하기는 불가능했다. GMS는 선교 훈련원을 조직하여 자원 준비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지난 10년 동안에 일어난 변화의 물결은 도도하였다. 먼저 선교 현장이 확대되었다. 전에는 공산권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상이었으나 러시아와 중국에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자 방대한 지역과 수많은 족속들이 GMS의 관심을 끌었다. 구 소련 치하의 많은 자치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기회가 왔고, 중국의 수천만에 이르는 지하교회 성도들은 큰 도전이 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도 선교사들이 투입되고, 미전도 종족이 주요 대상이 되며, 10/40 창문지역에 대한 관심 또한 선교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현장의 선교사들도 본부도 현장 팀을 만들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국가별로 지부들이 구성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80개가 넘는 국가 배치된 선교사를 14개 현지선교부 산하에 53개나 조직이 되었다. 사역에서도 아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여 갔다. 특기할 것은 신학교육, 즉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수많은 신학교가 탄생한 것이다.25모범적인 팀 선교를 하고 있는 필리핀에서도 3개의 신학교를 만들어 운영하면서도 수개처의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며, 태국, 우간다, 러시아, 탄자니아 등 선교지마다 다수 신학교가 개설되었다. 유치원을 필두로 학교사역에도 지역개발 사역에도 뛰어들었지만 그래도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교회 개척이었다. 그러나 예배당 지어주기 식의 교회개척이 어려운 문제를 불러온 쓴 경험도 하였다.

GMS의 선교본부와 구조에서도 대변혁을 가져온 시기이었다. 우선 선교사 출신으로 경험을 가진 자가 본부 행정을 책임지게 됨으로 지 교회들의 총회를 향한 태도가 바뀌어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지교회들이 선교사 파송에 수반하는 온갖 짐을 다 지고 있었다. 점차 이들 상당한 짐을 총회에 다시 맡기는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선교비 창구 일원화가 이뤄지고. 따라서 선교사의 복지나 사역의 공동화를 위한 기반이 서서히 구축되었다. 처음에는 선교사 파송교회들이 모여서 해외선교위원회를 조직하여 선교부의 사역을 돕기 시작하였다. 선교센터 건립 위원회, 훈련원 이사회 등을 통하여 선교부 사역의 보완에서 주도하는 쪽으로 발전하여 왔다. 드디어 1998년 총회에서 선교부를 폐지하고 총회세계선교회 조직을 허락하여 상비부에서 총회 직속기관으로 승격시킴으로 선교행정을 독립적으로 하게된다. 이 구조는 모달리티 조직에다 소달리티 성격을 가미하여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함으로 역동적인 선교기구로의 발전인 것이다.

본부의 사역자는 단순히 선교사 출신에서 나아가, 현역 선교사들이 국내사역의 일환으로 본부의 제반 업무를 분담함으로 행정의 실제성과 전문성을 극대화 하게된다. 결과 총회선교회 조직시에 10여명에 불과하던 본부직원이 40명에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고 사무실도 총회본부 건물 밖으로 나와 광대한 대지 위에 훈련원 시설을 위시하여 선교사 숙소와 은퇴 선교사를 위한 실버타운까지 준비하는 선교센터가 탄생되었다. 그러므로 변화되어 가는 21세기에 지구촌을 네트워크화 함으로 효율적인 선교관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듯이 GMS의 현대선교는 많은 변화 속에서 발전하여 왔고, 또 새로 오는 시대에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아직도 건전한 선교신학과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전략과 교회에 베풀어주신 크신 성장의 축복을 배경으로 도약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세계 복음화의 기수로써의 책임감과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어서 최전방 부대의 긍지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Ⅶ. 21세기에서 GMS의 전망

GMS는 21세기에서는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수 있도록 땅위의 모든 족속들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다. 이 목표달성을 세계교회와 함께 이룰 수 있도록 협력할 것이며, 국내의 타 교단들과도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추진할 것이다. 향후 10년 안에 전개될 GMS의 사역을 전망하여 본다면 매우 소망적이다. 목표달성에 우수한 전략을 구사하여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을 GMS를 기대하여본다.

먼저, 현재 1000명대의 선교사에게 2000명대로 증파될 것이다. 선교사의 개념도 목사, 장기, 주재 선교사에서 평신도, 단기, 움직이는 선교사들도 상당수 대체될 것이다. 목사편중(90%)인 지금의 선교사 인력 구조는 효율적인 팀 선교를 위해 평신도를 대거 참여시켜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이다. 현재 23개의 지역 훈련원에서 평신도 단기선교사 훈련과정이 진행되고 있으나 적어도 50개처의 훈련원에서 평신도 단기선교사, 평신도선교사 자원을 양성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목사와 평신도의 바울이 4대 6 혹은 그 이상으로 잡는다. 현재의 GMTI는 정예 선교사 양성과 재훈련에 힘을 쏟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들을 배치하고 지원하고 수용, 관할하는 선교구조가 개발되어 GMS는 참여하고 싶은 선교회로 성숙되어 갈 것이다. 선교사들을 위한 복지 즉 의료, 자녀교욱, 재훈련, 노후보장이 제도화되어 있을 것이다. 선교사 지원 시스템도 사역에 전념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부분적으로 공동재정(pooling system)이 뒷받침하게 될 것이다. 센터를 개발하여 선교행정만이 아니라 복지차원에서 다양한 시설과 제도가 정착되어 안정감 있는 선교사 관리가 이루어 질 전망이다. 이사회와 지회(노회 선교위원회)가 지교회들과 밀접한 관계 속에 선교사의 공동지원 및 관리가 이루어 질 전망이다. 따라서 지원체계도 노회나 지역 중심으로 책임지는 형태로 발전되어 갈 것이다. 이사회 안에 지역 위원회가 점차 현지 선교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 팀 사역을 지원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교 현장은 전략 선교지가 확정되어 적어도 500개 미전도 종족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자원 투입이 있게될 전망이다. 팀웍이 강화되어 14개의 현지 선교부26북한, 중국, 일본, 인도차이나, 실크로드, 동남아, 서남아, 유럽, 러시아, 서북 아프리카, 동남 아프리카, 태평양, 중미, 남미 등 14개 지역의 선교부를 말한다.를 중심으로 선교사들의 배치가 구체적인 현지 목표에 따라 이루어 질 것이다. 선교 대상도 복음의 수납도 보다 복음화 정도가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며, 지도자 양성 등 전략에서도 상황에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 대두될 전망이다. 현지 선교사 중심의 사역 철학은 변치 아니할 것이며, 선교사들이 기도하고 계획하며 헌신하여 추진하는 일을 후방에서는 지원하고 감독하는 공동 사역이 정착되리라 본다. 선교나 현장 팀은 본부와 지원 교회에 승인을 요청할 때에 상대적으로 기쁘게 동참하는 제도가 뿌리를 내릴 것이다. 현지 교회와 세계교회가 파트너로써 GMS와 동역하는데 상호간에 힘이 된 상호주의를 정착시킬 것이다.

Ⅷ. 나가는 말

GMS 100년사는 세계선교 역사상 뜻깊은 한 장이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2천년동안 사용하였으나 버려 두시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찾으시기를 또 2천년이 흘러갔다. 많은 나라와 족속이 뽑혀서 구속사의 주역으로 사용하여 되었다. 20세기에 뽑힘을 받은 백성들과 교회 주에서 GMS의 100년사는 주목해야 할 대상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한 세기동안에 GMS는 성공적으로 주어진 선교사역을 감당하였기 때문이다. 곧 21세기에 주께서 사용하실 수 교회 중에 하나로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GMS 예루살렘 선교에서 한 세기 안에 한민족(韓民族)을 기독교화 하는데 성공적이었다. 사마리아 선교는 아마 비서구 교회에 좋은 모델이라고 소개하여도 좋을 것이다. 현대 서구선교와는 반대로 물이 거꾸로 흐르듯이 문화적으로 앞선 대국에 소국에 복음을 역(逆)으로 잘 전했기 때문이다. 땅 끝까지 선교에 있어서도 충분한 경험과 경륜을 쌓았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각주
  • 1
    성령의 특별하신 간섭 즉 오순절 사건이라든가, 에티오피아 내시, 고넬료, 유럽선교 개시, 또는 특정 선교 대상 (Strategic Centers, People, Geographic) 혹은 전략적 대상(회당중심, 도시중심) 이나 사역 내용(전도, 양육,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두기도 하였다.
  • 2
    Ralph Winter나 Peter Wagner같은 선교학자들은 편의상 선교 대상을 중심으로 예루살렘(E-0, 동일 문화권 혹은 명목상 신자), 유다(E-1, 동일 문화권), 사마리아 (E-2, 이웃 문화)와 땅 끝(E-3, 다른 문화권)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 3
    한국교회 선교사 시대구분에서, 박기호 선교사는 학위 논문에서 일본 통치 시기와 교단 분열을(합동과 통합) 중심으로 나누었다. 즉 1907년 첫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던 때부터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던 때까지를 제 1기로, 다음으로는 1956년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그 선교사들이 태국을 떠나던 1975년까지를 제 2기로, 그리고 합동측과 통합특이 분열하던 1959이후 합동 측에서 1967년 대만에 선교사를 시작하던 때를 기점으로 하여 제 3기 혹은 현대선교라고 구분하였다. 한편 신홍식 선교사는 태국에서 회집한 선교대회에서, 태국선교로 시작된 현대 선교사를 10년 단위로 세분하여, 시작 전의 암흑기(1945-1955), 여명기(1955-1965), 태동기(1965-1975), 진흥기(1985-1995)로 나누었다.
  • 4
    물론 한 세기를 앞서 천주교회가 북경을 거쳐서 한인에 의하여 전파되어 활발한 전도와 성장이 박해와 순교의 와중에서도 이루어져 천주교회는 존재하고 있었다. 구츨라프나 토마스 같은 선교사에 의하여 복음의 소개나 스쳐지나가듯 하여 개신 교회가 전하여 졌다고 할 수 있으나 교회가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 5
    만주에서 개종한 한인 청년들의 도움으로 스코트랜드 장로교 선교부의 John Ross는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고 1882년에 심양에서 출판하였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처음으로 선보인 한글 성경이었다.
  • 6
    Underwood를 뒤따라서 호주에서 Davies 남매(1889년), 남장로교 선교부의 Tate (1892년),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McKenzie (1894년) 등이 공식 선교사로 속속 입국하여 본격적인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 7
    합동측은 세계 장로교단 중 미국의 PC(USA) 다음으로 많은 세례교인을 보유하고 있다.
  • 8
    조동진 박사는 민족수난기였던 1905년에서 해방 시까지 40년 동안에 당시 전체 한민족의 삼분의 일 이상이 한 반도를 떠났다고 하였다. 주로 만주(500만)와 일본(200만)으로 떠밀려갔으며, 한반도 안은 마치 애굽과 바벨론 포로 시절과 같았기 때문에 유례가 없었던 이 대 민족 이동 사건을 한민족의 출애굽으로 비유하였다.
  • 9
    총회록과 기타 관련된 각종 문헌들에 나타나는 GMS 파송 선교사(혹은 전도목사)들은 145명 이상 되며 이들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활동 하였다.
  • 10
    전도국은 공의회 시절의 전도 위원회를 게승하였으며, 길선주 목사와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 11
    그들 중에는 김이곤(1922), 오택환(1926), 박병훈(1940), 김길창(1929), 김치선(1936), 배신환 등도 포함되어 있다.
  • 12
    1980년대에는 이성우(1983) 외 14가정, 그리고 1990년대에는 21가정을, 그리고 2000년대에 와서는 3가정을 파송하였다. 대부분이 교포선교사들로 재일 기독교단과 기타 군소 교단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근래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을 상대하여 교회 개척사역을 하고 있다.
  • 13
    최관홀은 박해에 못 견디고 정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러자 그를 GMS는 파면을 하였다. 그 후에 모교회로 다시 돌아 왔지만 배후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 14
    우즈베키스탄을 위시하여, 카자크스탄, 타지크스탄, 키르키즈스탄과 같은 신생 국가들이다.
  • 15
    러시아에 1990년 이후 43가정을 파송하였고 그 중에 절반 이상이 주로 교포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였고, 이들 교포들의 통역과 협조로 러시아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있다. 자유를 얻은 정교회가 사역을 방해하여 비자 등 활동에 제한이 있었지만, 옛 장로교회의 흔적을 찾아서 정부에 교단으로 등록을 하는 등 발빠른 대처도 하여 왔다.
  • 16
    이때에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자 만주로 피난을 가서 신학교육을 하고 있던 박형룡, 박윤선도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와 나중에 평양신학교의 후신인 총신에서 교수하게 된다.
  • 17
    통계상으론 7000만을 헤아린다는 한민족 중 10%는 해외교포들로 한반도 밖의 지구촌에 흩어져 살고 있다. 다양한 목적으로 잠시 거주하는 교포들을 포함하며 숫자는 증가한다.
  • 18
    중국 네 번의 선교 기회가 있었다. 제1기(635-900?)눈 당대에 Nestorian 선교사 Alopen에 의해서고, 제2기 (1245-1368)는 몽고 제국시대로 문을 연 선교사는 Franciscan 의 John of Plano Carpini 였다. 제3기 (1583-1774)에는 Jesuit Society가 활약하고 Xavier이 중국 땅에 상륙하였고 Mateo Ricci가 본격적으로 활약하였으나, Clement XIV가 Jesuit Society를 폐쇄함으로 자연 철수되었다. 마지막 기회(1802- )는 개신교에게도 왔다. Morrison이후 다수의 선교 단체들이 입국하였다. 모택동이 중원을 장악함으로 잠시 공식적으로 문이 닫혔으나 안에서는 외부 선교사가 없이 중국교회 스스로 활발하게 선교하였다.
  • 19
    오지 전도국의 위원장은 길선주였다. 위원 김찬성과 박태로, 그리고 William Hunt는 북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현지 교회와 산동주재 미국 장로교 선교와 협의로 내양이 결정되었다.
  • 20
    랄프 윈터는 1980년 에딘버르 선교대회에서 현대 선교 200년을 3시대로 구분하고 1기나 2기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활약하던 시기이나 3기에 해당되는 2차대전 전후부터 지금까지는 비서구 선교사 시대가 괼 것을 내다보았다. 선교전도 세계전선도 세계전역 즉 모든 족속으로 뻗어나갈 것을 예상하고 숨겨진 족속에 집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새 천년을 마지한 지금은 복음적인 신자들이 비서구가 서구보다 훨씬 많아 졌으며, 비서구 선교사가 서구 선교사의 수를 훨씬 능가하고 말았다.
  • 21
    1970년을 시작하면서 김순일(태국), 차남진(미국), 양승만(브라질) 세 분만이 GMS 선교사였다. 그런데 1980년까지 10년간 18가정을, 그리고 1990년까지는 120가정을 추가 파송하였고, 2000년 8월 31일자 통계에는 사임한 선교사까지 도합 700가정 110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 22
    1970년 초반에 총신에서 일어난 학생선교 운동은 GMS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사당동 뒷산에서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던 소수의 학생들이 함께 모여서 전체 학생들에게 도전이 되기 시작하였다. 1974년에 CCC 강당에서 모였던 세미나는 총신에 선교의 불을 본격적으로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68회와 72회의 학생들이 상당수 앞장을 섰고 이들은 대부분 선교지로 먼저 나갔다. SMF을 위시하여 MMA등 학생선교단체들이 조직되어 선교의 열기를 가하였다.
  • 23
    1990년 Asia Missions Consultation이 충현교회에서 모였고, 1995년의 GCOWE도 충현과 사랑의교회 등에서 모였으며,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재정과 지도력으로 추진된 국제선교대회였다.
  • 24
    모든 민족 선교회, 필리핀 선교후원회, 형제 선교회, 태국선교후원회, 브라질 선교회등 수많은 선교 후원기관이 힘을 결집하는 팀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 25
    모범적인 팀 선교를 하고 있는 필리핀에서도 3개의 신학교를 만들어 운영하면서도 수개처의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며, 태국, 우간다, 러시아, 탄자니아 등 선교지마다 다수 신학교가 개설되었다.
  • 26
    북한, 중국, 일본, 인도차이나, 실크로드, 동남아, 서남아, 유럽, 러시아, 서북 아프리카, 동남 아프리카, 태평양, 중미, 남미 등 14개 지역의 선교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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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활영 원로선교사(장양백사모) -

1942년 12월 25일생, 장양백 사모와 1남2녀, 대구동신교회 1977년 필리핀 파송 선교사, GMS 초대사무총장, GMS 필리핀선교사, 필리핀 장로회신학교 초대학장, 필리핀 선교사자녀학교 초대교장 등 주요저서로는 그의 나라 그의 순례자/ 2018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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