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회 해외선교와 GMS 역사 (1907- ) » 고 김활영 원로선교사
I. 들어가는 말
한국 장로교회 사도행전 29장은 2000년 세계 선교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복음확장사 중의 한 장이었다. 지난 100년 동안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땅 끝까지 뻗어나가는 성령님의 강한 役事 중심에 서 있었던 장로교회는 歷史에 기억될 모범적인 선교교회(Missionary Church)이었다. 한 세기 동안, 이 선교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여러 가지 기적적인 일들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는 추진한 복음 확장 사역을 시대적 차서와, 선교지역 별로 구분하여, 그리고 내용을 따라 기술하려고 한다. 다음으로는 선교 신학과 전략 그리고 정책면에서 반성과 평가를 시도하려고 한다.
목차
II. 초기 선교 시대 (1907-1945)
1. 한 민족 교회의 탄생과 조직
옛 한 민족의 땅,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John McIntire가 네 명의 한인(韓人)청년들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876). 이로써 동방의 은자(隱者), 한민족(韓民族)에게 복음의 불길이 당겨졌고, 이로부터 한반도(韓半島)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간 십자가의 도가 건강한 한 선교교회를 탄생시켰다. 세계 선교역사에 흔치않은 사도행전적인 교회가 배태(胚胎)되고 태어나, 성장하면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여왔다. 2물론 한 세기를 앞서 천주교회가 북경을 거쳐서 한인에 의하여 전파되어 활발한 전도와 성장이 박해와 순교의 와중에서도 이루어져 천주교회는 존재하고 있었다. Karl Gutzlaff나 Robert Thomas 같은 선교사에 의하여 복음의 소개나 스쳐지나가듯 하여 개신 교회가 전하여 졌다고 할 수 있으나 교회가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 교회가 바로 한국 장로교회였고, GMS는 이 장로교회의 선교 담당기구이다.3 GMS (Global Mission Societ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는 장로교 합동측 해외 선교 기구로써 1998년에 총회 선교부를 재편한 것이다. GMS의 전신은, 1901년에 장로교 공의회 평양 시찰 안에 전도 위원회(Mission Committee)로 출발하여, 1905년 장로교 공의회 전도 위원회, 1907년 朝鮮 예수고 長老會 獨老會 傳道委員會 (Executive Committee of Foreign Mission 위원장 길선주), 1940년 총회선교부로 (Foreign Mission Board 부장 최지화) 명칭이 변경되어 왔다.
이성하, 백홍준, 서상륜 등은 한글 성경4 만주에서 개종한 한인 청년들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부의 John Ross는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고 1882년에 심양에서 출판하였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처음으로 선보인 한글 성경이었다.을 가슴에 품은 한인(韓人)사도들로 비밀리에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모국으로 스며들어 친지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1983). 백홍준은 그 후에 첫 순교의 제물이 되었고, 서상륜은 친척의 향리인 황해도 소래로 가서 교회를 시작하였으니 이는 한번도(韓半島)안에서 한국어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최초의 개신 교회였다. 이처럼 복음은 한반도의 북쪽을 통하여 한인 전도자의 주도로 들어 왔다.
한편 일본에 유학을 떠났던 이수정이 예수를 믿고 번역한 복음서가 동경주재 미국 성서공회가 6000부를 출판하였다 (1885). 그 해에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발을 디딘 서양의 장로교 첫 목사 선교사인 Underwood의 손에는 동경에서 얻은 한글 성경 수천부가 들려 있었다. 이렇듯 한반도(韓半島)안의 한민족(韓民族)을 향한 예루살렘 선교는, 한인(韓人)들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번역하고, 모국으로 복음을 들여와서 생명을 건 전도가 진척되었다. 복음의 씨는 뿌려지고 싹이나 자라서 드디어 열매 맺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서구 선교사들이 때맞춰 도착하였다.5 Underwood를 뒤따라서 호주에서 Davies 남매(1889년), 남장로교 선교부의 Tate (1892년),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McKenzie (1894년) 등이 공식 선교사로 속속 입국하여 본격적인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 서구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예루살렘 선교는 본격화되었다. 서구 선교사들의 현명한 지도와 먼지 제자가 된 한인(韓人)사도들의 헌신으로 한민족(韓民族)교회의 선교는 성장을 거듭하였다.
황해도 소래에 첫 교회가 시작되고 (1884), 서울에서는 신문내교회가 처음으로 당회를 조직하였다(1897). 드디어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독립 노회로 조직될 때는 6만의 신도를 가진 성장한 교회이었다 (1907). 이는 복음이 능력 있게 전파되고,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 가가는 기적과, 핍박과 순교도 따르는 사도행전적인 복음의 드라마가 한반도 구석구석에서 펼쳐진 결과였다. 예루살렘의 처음 제자들처럼, 한민족(韓民族)의 제자들 역시 집에 있든지 거리에 있든지 예수가 구주임을 전파하는데 쉬지 않았다.
민족(民族)교회가 탄생하여 성장하여 오던 시기는 한 민족사에서 가장 암울하던 때였다. 정치적으로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을 잃었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수탈과 착취로 말미암아 한반도(韓半島)는 사람 살 곳이 못되어 대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으며, 사상적으로 구심력을 잃고 방황하는 민족으로 전락하여 갔다. 이러한 때에 천국 복음은 가뭄에 단비였으며, 흑암 천지에 빛이었다. 그 결과 민족적 대 수난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교육제도와 병원을 통한 전도, 사경회와 문서사역 중심의 신앙의 심화, 영웅적인 교회지도자의 양성, 성령의 폭발적 부흥은 한민족(韓民族)의 예루살렘 선교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선교에 못지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선교사들의 뜨거운 선교정신과, 냉철하게 적용한 선교정책들도 주효하였다. 여느 선교지마다 경험하였지만 선교지 분할(Mission Comity)과 같은 정책은 선교자원의 불필요한 중복과 낭비를 막았으며, 네비우스 정책도 또 하나의 성공적인 모델을 세계 선교사에 추가하였다. 신생교회의 예루살렘 선교는 1907년대를 중심으로 오순절 때와 같은 성령의 폭발적인 부흥의 경험으로 日帝의 잔인한 핍박의 발굽아래 뿌려진 순교자의 피를 거름으로 성장하여 왔다.
2. 해외 선교의 시작과 확장
바울은 새 선교지마다 먼저 회당을 찾아서 복음 전파의 접촉점 혹은 거점으로 삼았다. 문화적 측면에서 유대선교라 할 수 있는 교포선교가 바울에게는 중요한 전략이었다. GMS의 교포선교는 처음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시작 되었다. 일곱 명의 목사를 처음으로 안수하고 독립노회를 조직하여 장로교 공의회로부터 지도력을 이양 받은 교회는 GMS의 전신인 “전도국”을 조직하므로 GMS가 공식으로 출범을 하였다 (1907). 첫 사업으로 일곱 목사 중 이기풍을 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하고 전국교회가 헌금과 기도로 참여하였다. 목사뿐 아니고 여전도사와 청년들도 조력자로 제주 선교사의 명단에서 들어있다 (이선관, 김형재, 김창문, 김홍련). 핍박과 표적이 동시에 따랐던 제주선교는 GMS의 상징적인 유대선교의 출발 이였다
한 민족 역사상 가장 어려운 때였던 1905년에서 1945년 사이에 한민족(韓民族)의 삼분의 일이 한반도(韓半島)를 떠나 이방 땅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6조동진은 민족수난기였던 1905년에서 해방 시까지 40년 동안에 당시 전체 한민족의 삼분의 일 이상이 한 반도를 떠났다고 하였다. 주로 만주(500만)와 일본(200만)으로 떠밀려갔으며, 한반도 안은 마치 애급과 바벨론 포로 시절과 같았기 때문에 유례가 없었던 이 대 민족 이동 사건을 한민족의 출애굽으로 비유하였다. 이들을 위해 GMS는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였다.7 총회록과 기타 관련된 각종 문헌들에 나타나는 GMS 파송 선교사(혹은 전도목사)들은 145명 이상 되며 이들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활동 하였다. 해방 후에도 GMS는 계속하여 한반도 밖의 동족을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한 반도에 가장 가까운 만주지역 선교는 GMS의 유대선교 중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가장 오랜 된 사역이다. 수천 년 동안 만주는 한민족(韓民族)의 영토였다. 고조선 이후 고구려와 발해시절은 한민족(韓民族)에 의하여 다스려진 고토(故土)로 주권을 잃은 수백만의 한인(韓人)들이 몰려간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1901년에서 1945년 사이 GMS는 백 명 이상의 공식적인 선교사를 만주 땅에 파송하였다. 그 결과 6개의 노회가 조직되고 1941년에는 모국과는 독립된 총회까지 조직하였고 만주 땅에 평양신학교를 대신하는 신학교까지 운영하였다. 지역도 나누어 남만주는 인접한 평안도 교회와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동만주 즉 간도지역은 함경도 교회와 캐나다 장로교선교부가 책임을 졌다. 2차 대전 후 일본이 만주에서 물러가고 공산권이 들어서므로 지역교회는 대거 귀국의 길에도 올랐고8이때에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자 만주로 피난을 가서 신학교육을 하고 있던 박형룡, 박윤선도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와 나중에 평양신학교의 후신인 총신에서 교수하게 된다. 나머지는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등소평이 개방정책을 들고 나올 때까지는 엄격하게 복음전파가 금지되었다.
일본선교는, 대개의 교포 선교지 처럼, 마케도니아 부름의 응답으로 출발을 하였다. 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YMCA 관련 학생들이 본국 교회로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다. GMS는 응답으로 일곱 목사중 한석진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박영일, 임종순 장로가 계승을 하고 드디어 학생선교범위를 넘어 교민전체를 상대로 전도가 진행되었다. 나중에는 감리교회와 협약하여 (1912) 공동사역을 추진하였다. 후에는 (1927) 성결교회도 참여함으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가 연합 선교전선을 구축하여 “在日 大韓 基督敎團”을 조직하기까지 하였다 (1934). GMS는 해방 될 때까지 14명 이상의 공식 선교사들을 교포를 위해 파송하였다. 9그들 중에는 김이곤(1922), 오택환(1926), 박병훈(1940), 김길창(1929), 김치선(1936), 배신환 등도 포함되어 있다.
최관홀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송함으로 러시아 선교가 막이 올랐다 (1909년). 그때는 시베리아지역에 이십만이 넘는 교포가 있었다. 그 다음해에 한병직을 해삼위로 증파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선교는 러시아 정교회의 방해에 부딪혀서 어려움을 겪었다. 10최관홀은 박해에 못 견디고 정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러자 그를 GMS는 파면을 하였다. 그 후에 모교회로 다시 돌아 왔지만 배후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럼에도 본부에서는 김형찬과 주한 캐나다 선교사 부두일과 또 적지 않은 선교사를 계속 파송하였다 (박창연, 최홍종, 오순형, 그리고 여전도사 등). 그리하여 1922년에는 이 지역에 독립노회까지 조직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소수 민족정책의 여파로 수십만의 교포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고11 우즈베키스탄을 위시하여, 카자크스탄, 타지크스탄, 키르키즈스탄과 같은 신생 국가들이다. 이곳에 흩어진 교포들은 스탈린 시절 시베리아에서 강제 추방당한 자들이다. 사역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공산당의 종교 말살 정책으로 엄청난 핍박이 따르자 사역은 지하로 잦아들게 된다.
중국 본토를 향한 유대선교도 초기부터 활발하였다. 당시에 주변 여러 곳으로 흩어져간 교포들 중에 적지 않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어서 곽안련의 표현대로 “교회를 들고 가서”(have taken their churches with them) 대도시마다 교회를 자발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들에게 GMS는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다 응해 주지는 못하였지만 중국 여러 곳에서 교역자 파송 요청을 해왔다. 거대한 대륙으로 흩어져간 한민족의 이민 물결이 2차 대전 후 다시 철수할 때까지 활발한 사역이 진행되어 1940년대는 북경, 천진, 소주, 청도, 제남, 무한 등 제도시들을 중심으로 교포 노회들이 탄생했다. 2차 대전 후 동포들의 대거 귀항과 공산정권이 국민당을 몰아내어 중원을 장악하므로 선교사도 교회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남아있던 다수의 교회는 지하로 들어갔다.
3. 이방인 선교의 시작과 발전
GMS의 이방인을 향한 초문화 선교는 총회가 조직 되면서 시작 되었다 (1912). 총회는 이웃 사마리아라고 할 수 있는 중국백성을 위해 선교사 파송을 결정하였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종교와 사상을 위시하여 문물이 한 민족에게 전래 되어 왔지만 복음의 경우는 달랐다. 복음의 물결은 한반도에서 중국 대륙으로 거꾸로 흐른 것이다. GMS가 선교사 파송을 결정하던 그 해는 바로 만주족의 대청제국이 무너지고, 현대 중국의 새 공화국이 손문(孫文)을 대통령으로 장을 열면서 바야흐로 중국선교의 황금기가 시작하던 때였다.12 중국 네 번의 선교 기회가 있었다. 제1기(635-900?)눈 당대에 Nestorian 선교사 Alopen에 의해서고, 제2기 (1245-1368)는 몽고 제국시대로 문을 연 선교사는 Franciscan 의 John of Plano Carpini 이었다. 제3기 (1583-1774)에는 Jesuit Society가 활약하고 Xavier이 중국 땅에 상륙하였고 Mateo Ricci가 본격적으로 활약하였으나, Clement XIV가 Jesuit Society를 폐쇄함으로 자연 철수되었다. 마지막 기회(1802- )는 개신교에게도 왔다. Morrison이후 다수의 선교 단체들이 입국하였다. 모택동이 중원을 장악함으로 잠시 공식적으로 문이 닫혔으나 안에서는 외부 선교사가 없이 중국교회 스스로 활발하게 선교하였다.
선교지 는 공맹(孔孟)의 고향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 땅 산둥 성이었다. 창립총회 석상에서 황해노회의 박태로 목사가 후보로 선임되었다. GMS 위원들이 현장답사를 하고 현지교회와 주재하고 있던 서구 선교단체와 협의를 거쳐 來陽縣을 사역지로 확정하였다. 13 외지 전도국의 위원장은 길선주였고, 위원은 김찬성과 박태로, 그리고 William Hunt는 북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현지 교회와 산동주재 미국 장로교 선교와 협의로 내양이 결정되었다. 추가로 선임된 김영훈, 사병순과 함께 박태로는 가족을 대동하고 제물포를 떠나 선교지로 향했다 (1913). 총회 조직의 감격으로 시작하여 많은 수고로 터를 닦고 있던 산동선교는 한 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박태로는 질병으로 사망하고, 나머지는 본부와 충분한 연락이 없는 상태에서 철수하고 말았다(1917).
선교본부는 이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방효원을 파견하였으며, 총회는 철수한 선교사를 이어 방효원과 홍승한을 파송하였다 (1918). 선교사들은 내양현 南關에 본부를 두고 사역을 시작하는데, 이듬해에 박상순이 참여하여 제2기 팀이 구성되었다. 제2기부터 본격적인 산동선교 사역이 시작된다. 방효원은 팀장의 역할을 잘 하였다. 홍승한이 바나바와 같은 지도자였으면 방효원은 바울 같은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 1922년 평북 여전도회 연합회의 지원으로 이대영이 파송되어 오자 산동선교부는 내양현의 서남부에 위치한 즉묵에 새 지부를 열고 홍승한과 팀을 이루게 하였다. 박상순은 교육과 행정에 뛰어난 은사를 보였다. 그는 선교사 자녀 학교를 열었고, 후에 성경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대영은 뛰어난 지도자였고 능력 있는 부흥사였다. 홍승한은 한 텀을 마치고 선교비의 어려움으로 총회 선교부가 소환 귀국하였다 (1924). 그때에 김윤식(1918년)이 의사로서 내양에 와서 개업하고 협동 선교사가 되어 선교사를 돕기 시작하였고 그를 이어 의료 선교사 (주현측 1923, 안중호 1931)와 자녀학교에서 봉사하는 선교사도 생겼다 (조소임 1922, 이영애 1924, 편순남 1930).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여성을 위하여 김순호를 후원하여 총회가 파송 (1931년)하니, 처음의 독신여성 초문화 선교사였다.
이 시기는 산동선교의 전성기였다. 한국 선교사들의 활동에 감동한 중국교회는 140만 인구를 포용하는 내양현 전체를 선교지로 내어 주었고, 나아가 이웃에 있는 해양현(海洋縣)의 일부까지 선교지로 편입하였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한국 선교사들의 사역지에 내양노회를 조직하는데 까지 발전하는가 하면 (1933), 교회가 20여처, 기도처가 30여처로 늘어났고, 세례교인이 1,000명을 넘어서고, 10여개의 학교도 운영하였다. 한국식 사경회와 송상절, 김익두, 등 초청강사와 이대영이 인도하는 부흥회가 성행하였으며, 쾌자(快子)를 통한 성경 읽기 운동, 화동 성경학교에서 지도자 양성, 십일조 헌금 장려 등으로 선교지 교회가 한국교회처럼 든든하여 갔다.
개척자 방효원이 은퇴를 하고 (1936), 이듬해에 그의 아들이 계승하면서 대륙에는 대동아 전쟁의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여 선교부는 수난의 시기를 맞이한다. 김순호는 만주로 선교지를 옮겼다(1938년). 방지일 을 맞이한 박상순, 이대영으로 구성된 제 3기의 산동선교 팀의 마지막 3총사에게는 가장 험난한 선교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상순은 전쟁 통에 내양으로 내왕을 하다가 결국은 귀국 (1940)하게 된다. 이대영은 즉묵(卽黙)을 중심으로 사역 하던 중 장개석이 대만으로 옮겨오던 1948년 귀국하였다가 영영 귀임하지 못하고 만다. 방지일은 초기부터 전쟁으로 선교지인 내양에 부임하여 보지도 못한 채 일시 철수를 하였다가 다시 청도(靑島)로 들어가 활동하게 된다. 그는 20년간 난리 통에도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자를 양성하며 전쟁 난민소에서 먹이고 입히는 일이며, 핍박 중의 교회를 지키며, 격려하면서 꿋꿋이 버텼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시작되던 때까지 선교지를 지키다가 결국은 공산당에게 쫓겨난 최후의 선교사가 되었고, 부산으로 귀국함으로 GMS의 사마리아 선교는 첫 막이 내려지고 말았다 (1957).
4. 건강한 교회와 건강한 선교
GMS의 초기선교는 본국을 향한 예루살렘 선교와 교포 선교, 그리고 이웃 민족을 향한 초문화 선교에서 영광과 함께 환란이 점철된 역사였다. 로마제국 식민지의 유대인으로 시작한 초대교회처럼, 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처절한 여건에 처한 한 민족의 장로교회가 그 초기 선교에서 영광스러운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주님의 축복이었다.
주님의 축복으로 교회와 선교사역은 건강하였다. 이 건강의 큰 동력원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같은 1907년의 대 부흥이었다. 부흥의 물결에 교회는 힘을 얻고 깨끗하여졌다. 선교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순수한 구령의 열정으로 선교에 임하였고, 청교도적인 삶과 사회변화가 저변에 있었다. 모든 지상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생각하고 타교단과 외국 선교부와도 기쁘게 동역하였다. 전국의 교회들은 자기교회 선교사로 생각하고 후원하며 기도하였다. 철저하게 성경을 중심으로 살고 사역하였다. 선교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지도자들을 선택하였다. 실제로 산동에 파송된 목사 여덟 명 중 네 명이 후일 교단 총회장이 되었다. 교역자 중심의 사역을 펼치긴 하였어도 흩어져 간 수많은 성도들이 선교사역의 일선에서 활약은 놀라웠다.
선교 정책에서도 교단 선교부가 중심이 되었다. GMS는 서구 선교부처럼 전형적인 교단 선교구조에 충실하였다. 본부와 현장 선교부는 장로교회 행정 원리를 따라 질서가 있었으며, 전국 교회가 협력하는 선교구조였던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경험 없이 시작한 선교행정에서 많은 위기들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든든한 선교부 조직과 지도력이었다. 교포 선교사들이 현장에 독립적인 교회를 조직하고, 초문화 선교사들이 교적을 중국 교회로 옮기고, 수용 기관에서 허락받은 선교지를 지킨 것은 정책의 건강을 입증한다.
선교 전략 역시 전 방위적인 종합사역으로 교회 개척과 지도자 양성은 물론 의료와 교육에도 관심을 두었다. 성경학교와 심지어 선교사 자녀를 위한 학교까지 운영하였다. 동시에 문화적인 동질성을 이용하여 전도와 양육에 효과를 극대화 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문 선교와 부흥회, 성미제도 등의 효과는 선교사의 경험과 동질 문화권이어서 가능하였다. 파송교회는 극심한 가난 가운데도 힘에 넘치는 선교비를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비극에 처한 선교지 동포와 현지인들에게 떡과 복음을 나누는 선교였다.
III. 중간기 선교 시대 (1945-1970)
1. 땅 끝 선교의 시작
해방을 맞이한 GMS는 혼란의 와중에서도 선교를 계속하였다. 중국 선교의 문이 닫히면서 대만선교가 시작하였다. 총회는 대만에 선교사를 보내어 장차 산동에서 계속하도록 결정하였다 (1956). 피택된 계화삼은 항상 자신을 산동에 들어갈 대기선교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만주에서 자라고 신학을 한 계화삼은 먼저 교민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개석과 함께 본토에서 피난 온 정성원 전도사가 1949년 이후 길륭과 교웅에 한인(韓人)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일에 산동에서 피난 온 화동 성경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피난민교회를 시작하였다가 아르헨티나로 사역지를 옯겼다 (1969). 이런 유의 교포 사역은 브라질(양승만 등)과 미주지역에서 계속 되었다.
동아시아 교회 협의회 (EACC) 모임에서 태국은 아시아인 선교사를 요청하였다 (1954). 회의에 참석하였던 한국 대표단은 도전을 받고 선교사 파송을 작정하였다. 다음해 GMS는 최찬영과 김순권을 선교사 후보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동란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어렵고 힘든 여러 상황은 여권을 내는 일 조차 어려웠다. 결국은 김순권은 여권 발급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대신하여 김순일이 피택되었고, 이들 두 가정이 방콕에 도착함으로 GMS의 또 하나의 새로운 선교, 즉 땅 끝까지 선교가 출발하게 되었다 (1956).
이미 영어, 중국어, 일어 등에 능통하였던 이들 엘리트 선교사들이 짧은 시간에 언어를 익히고 문화를 습득하여 능력 있게 사역하도록 잘 배치도 하여 주었다. 최찬영은 방콕의 교회와 병원에서, 김순일은 Chiang Mai의 지역교회에서 각각 임무를 맡았다. 최찬영은 성서공회 사역에 집중하여 후일 마닐라와 홍콩을 무대로 아시아 지역의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김순일(1956~1976)은 최전방의 야전병으로 넓은 선교지의 밀림과 동리들을 배경으로 뛰었다. 그는 곧 서구 선교사에 뛰어 넘는 신뢰를 태국성도들로부터 받았고 즉시 노회장으로 피택되어 분주하게 순방에 젊음을 불 태웠다. Princeton에서 연구하였고 Fuller를 통해 제1호 한국 선교학 박사가 되었다. 이런 선교사들로 GMS의 태국선교는 참으로 화려한 출발을 하였고 대내외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성공적인 사역을 하였다. 태국교회에서 반응은 지금까지도 비서구교회로는 가장 훌륭한 선교교회란 인상을 깊이 심어주었고 서구 선교사들에게도 한국 선교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2. 땅 끝 선교의 확산
GMS는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먼 나라, 땅 끝의 여러 족속들을 향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현대한국 선교의 지도자인 조동진은 GMS 밖에서 선교 훈련원을 세워 선교사를 양성할 뿐 아니라 서구식 초교파 선교단체 (KIM)를 설립하여 선교사 (김순일, 윤두혁, 신홍식 등)를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땅 끝에서 들려오는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에 응답하여 복음의 빚을 갚으려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장로교회 안에서 잉태되어 자라가고 있었고, GMS는 이들을 선교지로 파송하기 시작했다.
GMS가 수적인 면이나 시기적으로 타 교단이나 선교단체보다 선교에 앞섰다. 특히 초문화 선교의새 불길은 교단들 중에 먼저 붙기 시작하였다. 태국 선교는 큰 자산이었다. 현대 한국선교의 지도자들도 교단에 많았다. 또 ’60년대 에서’70년대 초에 총신에서 학생들에게 도전한 선교운동은 남반구 교회의 선교지도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교단의 보수신학이 선교신학에 끼친 영향은 진보교단들과 대조적이었다. 또 교회의 급성장, 나아가서 한국의 경제가 급성장한 것도 한 몫을 감당 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본격적인 땅 끝 선교 확장은 ’7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IV. 현대 선교 시대 (1971- )
1. 열방으로
현대 선교의 선발 선교사들은 신홍식과 서만수였다. 신홍식 (왕십리 후원 1971)은 KIM과 GMS 선교사로 태국의 김순일을 계승하였다. 테국은 GMS의 첫 이방인 선교지역이다. 정승회(왕십리 1979)를 이어서 김성곤(대구 서문 1984), 강대흥 (예손 1987), 김종일(늘사랑 1989)등과 ’90년대 와서는 김정배 (대전 중부 1990)를 필두로 여러 명이 파송 되었다. 태국은 GMS의 가장 큰 규모의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선교지 중의 하나이다. 14 중국은 500명 가까이 그리고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러시아 등에는 각 나라마다 100명 내외의 선교사를 배치하고 있다. 태국기독교회 (CCT)와 복음주의 연합회 (EFT)를 수용기관으로 하여 여러 개의 현지 선교부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교회 개척과 신학교 교수, 지도자 양육에서부터 고아원, 유치원, 학교사역등 다양한 사역을 팀을 만들어 추진하고 있다. 중간기의 선교사역을 계승하기도 하였으나 새로운 개척 사역을 통하여 GMS의 브랜드를 개발하였다. 목회자 재교육 같은 사역은 현실적이었으며 선교사 자녀 기숙사 운영 같은 특수 사역도 개발하였다. 태국 선교는 GMS의 모델로써 위치를 지켜오고 있다.
서만수 (충현 1971)는 현대 선교의 선두 주자로 인도네시아 선교를 개척 하였다. 그를 좇아서 박종형 (장전 1990), 김익배 (1988)등이 파송 되었고, 김병선 (1983)외 여러명의 GP 선교사가 공동회원으로 사역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선교지역도 넓지만 많은 선교사가 다양한 사역을 통하여 많은 성과를 거주고 있는 중요 전략 선교지이다. 교포 선교를 위시하여 대규모 교회개척 지원, 선교사 훈련, 종족입양, 대학과 신학교 운영, 큰 규모의 병원, 기술학교와 유치원, 일반학교 등 교육을 통한 선교, 농장과 학원 등으로 미전도 종족에게 접근하고 있다.
현대 일본 선교는 김형탁 (대구 서현 1972)과 백병수 (대구 동신 1974)를 파송하여 재개했다. 이성우 (영성 1982), 임도신 (신일 1983)등 ’80년대 까지 파송된 선교사들은 재일교단을 중심으로한 교포사역이 주를 이루었으나 ’90년대부터는 일본인을 위한 사역을 확장하여 갔다. 가장 가깝고도 복잡한 관계를 가진 이 백성들을 향한 GMS의 도전과 열정은 큰 규모의 선교사단이 입증한다. 숫자적 성과가 적은 이 나라에서 서구 선교사들이 흉내 낼수 없는 사역을 한국 선교사들이 감당하고 있다. 필리핀 선교는 대구의 동신교회가 김활영 (1977), 백병수 (1980)를 파송하여 개척하였다. GMS는 전략적 집중 선교지로 결정하고 대규모의 선교사단을 파송하였다. 지금까지 국가별로는 항상 최다의 선교사를 보유한 팀이다. 처음으로 독자적인 장로교단 설립을 목표로 정하고 종합적인 선교를 추진한 모델케이스가 되었다.
대만은 김홍초 (대구 동신 1979)와 이진희 (성도 1984)가 파송되어 새롭게 시작하였다. 교포를 중심한 전임자와는 달리 중국인과 대만인들 상대로 교회를 개척하고, 개혁교회와 협력하여 신학교도 운영하면서, 본토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도 하였다. 한편 중국 본토 선교의 재개는 등소평의 개방 정책의 일환으로 문이 열렸다. 송영걸 (강경제일 1988)과 원우연 (왕성 1990), 김은배(성광 1991)등이 은밀하게 파송 되었다. 그후 수백명에 이르는 대 선교사단이 많은 족속들 가운데 활약하고 있으나 감금과 추방 등의 위험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마지막 시대의 최대의 선교교회를 세워 가는데 헌신하고 있다. 홍콩에는 홍종만이 (충현 1982)교포교회를 시작하여 선교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몽골(천강민 1991) 에도 상당수의 선교사가 투입되었다.
태평양 지역에 흩어진 섬나라에는 구암 (조환 1973), 호주 (김태현 1978), 사이판 (이만열 1981), 뉴질렌드 (정택정 1993), 파푸아 뉴기니 (김의정 1979), 팔라우 (백병수 1993), 피지 (선우형식)에 사 역을 시작하였다. 말레이 반도, 싱가폴 (조기술 1983), 말레시아 (최종국 1993)도 선교 기지가 개척되었다. 또 인도차이나 반도는 선교의 문이 늦게 열렸으나, 베트남 정원 (1994), 라오스 (정한길 1992), 캄보디아 (김진욱), 미안마 (김균배)는 제한된 여건 아래서도 다수의 선교사를 배치하고 있다. 남아시아의 인도 (정윤진 1984), 방글라데시 (이계혁 1989), 파키스탄 (차수열 1990), 스리랑카 (최재영 1991), 네팔 (박웅현 1996)도 GMS의 중요 선교지로 등장하였다.
중동 지역과 공산주주의가 무너진 옛 소련 연방에도 재빨리 선교사가 들어갔다. 이집트 (이연호 1977), 터키 (조용성 1987), 쿠웨이트 (정명섭 1994), 이스라엘 (김주경 1984), 바레인 (이춘우 1992), 요르단 (정형남 1989), 레바논이 새 선교지가 되었다. 러시아 (박시경 1989), 시베리아 (우동수 1991), 우크라이나 (윤상수 1991), 키르키즈스탄 (최근봉 1998), 우즈베키스탄 (신윤섭 1993), 카자크스탄 (김영락 1993), 타지그스탄 (이병찬)이 들어가 거의 현지화된 교포들이 첫 번째 선교대상이었다.
유럽은 역시 교포들이 선교사를 불렀다. 독일 (육호기 1976), 영국 (김호근 1984), 오스트리아 (박시경 1988), 프랑스에서 많은 교포 교회들이 세워지고, 동유럽의 그리스 (김수길(1997), 불가리아 (김호동 1992), 알바니아 (이용범 1993), 코소보 (정병철 1997), 헝가리 (김선택 1999), 오스트리아 (이상호), 루마니아 (김황곤 1994), 체코 (김양기 1992)가 문이 열리자 선교사들이 투입되고 주로 현지인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아프리카는 동부에 먼저 진출 하였다. 케냐 (한경철 1983), 에티오피아 (박수일 1992), 우간다 (임옥순 1988), 탄자니아 (이신애 1990), 수단, 에리뜨리아가 개척되었고, 남부 아프리카의 남아공 (한성수 1993), 말라위 (임광재 1990), 짐바브웨 (박란순 1991), 잠비아 (박상순 2001), 나미비아 (조현신 1987) 사역을 시작하였고, 서북부는 나이제리아 (강승삼 1981), 가나 (유종재 1981), 블키나 파소 (최희춘 1990), 라이베리아 (조형섭 1987), 감비아 (이재환 1982), 세네갈 (지민경 1991), 말리 (안창호 1994), 니제르 (임준표1988), 챠드 (양승훈 1997), 토고 (김미옥 1987), 시에라레온 (김경술 1992) 기니 비사우 (이인웅 1990), 알제리아, 투니지, 모록코에 골고루 선교사가 배치되었다. 이들의 사역은 처음부터 아프리카 여러 인종을 대상으로 교회 개척부터 모든 종류의 사역을 발전 시켰다.
라틴 아메리카 선교는 브라질 (양승만 1969)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 (김충일 1980), 파라과이 (유병태 1985), 볼리비아 (이기제 1987), 페루 (김복향 1987), 과테말라 (안명수 1989), 수리남 (안석열 1987), 우루과이 (차재홍 1992), 가이아나 (강대성 1991), 에크아돌 (이영 1995), 코스타리카 (조운제 1996), 멕시코에서 처음에는 교포 중심이었으나 곧 현지인 중심의 사역으로 발전 되었다.
이렇게 열방으로 (현재는 97개 국가) 흩어져 간 2000 여 선교사와 교회 (GMS)는 마지막 선교시대의 주류 세력으로 성장하여 세계 복음화의 꿈을 안고 분주하다.
2. 현대 선교의 도약과 환경
GMS의 현대선교 시대는 세계선교에 있어서도 격변기였다.15 Ralph Winter는 1980년 Edinburgh 선교대회에서 현대 선교 200년을 3시대로 구분하고 1기나 2기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활약하던 시기이나 3기에 해당되는 2차 대전 전후부터 지금까지는 비서구 선교사가 주축이 되는, 즉 남반구 시대가 될 것을 내다보았다. 세계전역 즉 모든 족속으로 뻗어나갈 것을 예상하고 숨겨진 족속에 집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새 천년을 마지한 지금은 복음적인 신자들이 비서구가 서구보다 훨씬 많아 졌으며, 비서구 선교사가 서구 선교사의 수를 훨씬 능가하고 말았다, 1959년 교단 분열후 1970년에는 세 가정만이 (김순일, 차남진, 양승만) 공식으로 소속선교사로 남아 있었으나, 그 때 부터 선교사를 속속 파송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2000명이 넘는 초대형 선교기구로 발전하였다. 가히 하나님의 특별 간섭이라 할 정도의 성장이었다. 이런 선교사 숫자 증가에 따르는 제반 선교환경의 변화와 발전 또한 괄목할 현상이다. 곧 제도가 발전되고, 활발한 지교회들의 선교참여, 사역의 방안도 다양하게 개발되었으며, 선교사들의 모습도 바뀌어져 갔다. 이러한 성장을 진단하여 보고, 그 변화와 발전 모습을 10년을 주기로 살펴보자.
선교의 이런 확장의 배후에는 ’60년대와 ’70년대에 일어난 교회의 급성장이 바탕이 된다. 세계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교단중의 하나로 성장한 것이 주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급성장의 배후에는 보수 신학이 있었고 ’70년 초부터 총신을 중심으로 전개된 학생들의 선교운동은 현대선교 활성화의 못자리 역할을 한 셈이기도 하다. 그때 선교 운동에 앞장섰던 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GMS의 선임 선교사들이 되어있다. 또 훌륭한 선교 지도자들의 (조동진, 김준곤, 김의환) 영향을 무시 할 수 없다. 이들이 교단적, 전국적인 선교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면, 개 교회 목사로써 선교를 진흥하고 실제로 선교사를 파송한 목사들 (김창인, 김창렴 등)의 역할이 컸다. 현대 한국선교사들의 선임자들은 거의가 GMS 선교사들이고, 한국인 제1호 선교학 박사도, 그리고 새천년이 시작되기 전까지 현지사역 경력을 가진 자로 선교학 관련 학위소지자의 대부분도 GMS에 속해 있다.
선교를 활성화시킨 선교구조를 보면 교단의 교회 패턴에 걸맞았던 개 교회중심 선교체제였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개교회 선교사는 없었고 다만 교단 선교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교단 선교부는 개교회의 열심을 좇아가지 못하였다. 회중의 대소를 막론하고 자기 교회선교사를 파송하기를 열망한 ’80년대의 교단의 지교회들은 파송과 지원을 전담하는 자기 선교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국가적으로 전에 없었던 경제성장과, 올림픽 개최 등의 국제적인 지도력과 외교적 입지, 수많은 대학생의 증가, 엄청난 숫자의 이민과 해외 진출은 대규모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적 요소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시킨 대형집회 등으로 한국 교회의 힘을 세계에 보여 주면서 선교 방면에서도 책임을 맡기 시작한 것을 들 수 있다. 16 선교 관련 국제적인 집회가 한국에서 모이기를 시작하고, 나아가서 그런 집회를 주도하기까지 한 것을 들 수 있다. 1990년 Asia Missions Congress가 충현교회에서 모였고, 1995년의 GCOWE도 충현과 사랑의 교회 등에서 모였으며,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재정과 지도력으로 추진된 국제선교대회였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교포 선교사보다 초문화 선교사가 압도적으로 증가하였다. ’70년대 말까지는 극소수의 선교사만 현지인 중심사역에 전념하였고, 대부분 교포사역을 겸하거나 한인교회에 매달렸다. 또 한인교회를 통한 현지인 선교는 아직은 미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선교비 송금과 선교사 파송에 국가적인 제약이 없어졌다. 아프리카로 들어가면서 국제적인 선교기관의 협조를 받아서 동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시아 쪽으로 다수의 선교사를 배치하였다. 선교전략회의도 ‘80년대에는 선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파송교회들의 협력으로 소집되어 활발하게 반성하며 연구하는 선교로 가고 있었다. 지교회의 선교열은 파송하는 교회들이 협력하여 일종의 선교단체를 만들어 협력으로 선교를 지원하였다. 17 모든 민족 선교회, 필리핀 선교후원회, 형제 선교회, 태국선교후원회, 브라질 선교회등 수많은 선교 후원기관이 힘을 결집하는 팀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소규모 선교단체들은 선교회 기능을 상당히 가지고 독립적으로 선교사와 사역을 관리하고 있다. 선교현장에서도 팀들이 구성되어 갔으며, 필리핀, 태국에 현장 선교회가 먼저 조직 된다.
’90년대에 일어난 변화의 물결은 도도하였다. 먼저 선교 현장이 확대되었다. 구 공산권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상이었으나 러시아와 중국에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자 방대한 지역과 수많은 족속들이 GMS의 관심을 끌었다. 구소련 치하의 많은 국가들의 독립과, 중국의 수십만에 이르는 지하교회들, 인도차이나 반도, 중동이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특히 10/40 창문지역과 미전도 종족에 대한 관심은 선교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선교사 배치에서도 ’80년대에 이어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혹은 국내 자생 선교단체와 공동 선교사 제도를 상호협약으로 발전시킨 점이다.18 국제적인 단체로 AIM, SIM을 비롯하여 SIL, OM, OMF, WEC, 국내 자생 단체로 AFC, GMP, GP, HOPE, KHE, MET 등으로 전체 선교사의 10% 이상을 파견 사역하게 하고 있다. 그중에 SIM과 GP가 가장 오랜 동역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선교사 수도 많다. 사역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여 갔다. 특기할 것은 신학교육, 즉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수많은 신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유치원을 필두로 학교사역에도 지역개발 사역에도 뛰어들었지만 그래도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교회 개척이었다. 그러나 예배당 지어주기 식의 교회개척이 어려운 문제를 불러온 쓴 경험도 하였다.
’90년대는 GMS의 선교본부와 구조에서도 대변혁을 가져온 시기이었다. 우선 선교사 경험을 가진 자가 본부 행정을 책임지게 됨으로 지 교회들의 총회를 향한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지 교회들이 선교사 파송에 수반하는 온갖 짐을 다 지고 있었다. 점차 이들 상당한 짐들을 총회에 다시 맡기는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선교비 창구 일원화가 이뤄지고. 따라서 선교사의 복지나 팀 사역을 위한 기반이 서서히 구축되었다. 처음에는 선교사 파송교회들이 모여서 해외선교위원회를 조직하여 선교부의 사역을 돕기 시작하였다. 선교사 훈련원 이사회 등을 통하여 선교부 사역의 보완에서 주도하는 쪽으로 발전하여 왔다. 드디어 총회조직에서 선교부를 폐지하고 총회세계선교회 조직하여 상비부에서 총회 직속기관으로 승격시킴으로 선교행정을 독립적으로 하게 된다(1998).191980년에 총회 본부에 선교국을 두어서 선교행정의 전문화를 기하였으며, ’90년대부터는 선교사 출신 전문인이 국장을 맡았고, 1998년에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상비부서인 선교부를 총회 세계 선교회로 (GMS) 재편하여 전문 선교기구화 하였다. 이 구조는 모달리티 조직에다 소달리티 성격을 가미하여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함으로 역동적인 선교기구로의 발전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선교지는 더욱 광대하여 지고, 사역도 발전되어갔다. 특히 그동안 교파 분열로 헤어졌던 교회들이 본 교단으로 귀속하면서 소속 선교사들이 GMS 회원으로 들어오자 숫자가 급증하였다. 그러나 교회와 선교현장에 문제도 그 만큼 많아지고 갈등도 동시에 커졌다. GMS는 안으로는 동원과 선교사 관리, 밖으로는 선교의 방향과 전략 수립을 위해 많은 자원과 시간을 투입하기 시작한다. 새천년을 맞이한 세계선교 환경도 급변하고 있다. 이제는 남반부는 피선교지가 아니고 세계 선교의 주류 세력으로 등장한다. 후기 현대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종교 다원주의를 비롯한, 전통종교의 부흥, 정치, 경제, 군사, 문화계에 일고 있는 거센 세계화의 바람은 선교 현장의 도전적 환경이다. 세계 선교계도 새로운 전략으로 이 새 환경에 대처하고자 안간힘을 쓰고있다. 이제는 상황화라든가 자신학화등의 용어와 교회개척운동이다 내부자 운동이 평상어로 바뀌었다. 민족복음화 운동이나 남아있는 과업완수란 과제로 씨름하고 있다.
3. 현대 선교의 과제
GMS는 양적으로 급성장하면서 풀어야 할 과제도 많아지고 있다. 세계 선교의 주류 세력이라 자칭하나 세계 선교의 흐름에서는 크게 뒤저있다. 가장 큰 선교부 중의 하나이나 자랑할 만한 모델 사역 팀이나 사역을 내어 놓기가 부끄럽다. 이런 문제들의 근원은 선교신학, 선교사의 선택과 훈련및 배치의 정책, 개교해 내지는 개인주의와 단일문화 배경, 연구와 반성의 부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GMS의 당면한 과제들은 어떤 것일까?
첫째, 선교 신학의 정립이 시급하다. 예를 들면 교회중심에서 하나님의 나라 중심으로 교회관이 정돈되어야한다. 지교회 중심 교회관 때문에 문제가가 많이 발생한다. 물량적으로 다수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많은 선교비를 동원하고, 현지에 많은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선교의 성공이라고 본다. 상황화 라든가, 자신학화와 같은 현장에 필요한 문제는 관심 밖이다. 선교의 동기, 의미, 목적에 혼란이 많다.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민족들 가운데 확장되는 거시적 안목에서, 그리고 구체적으로 현장에 세워 저야 할 교회를 이해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특별히 변화가 급격한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시대에 의사소통이 되는 신학화 작업 없이는 허공에 주먹질하는 선교가 되기 십상이다.
둘째, 비전 제시가 선명하지 못하다. 5000명 선교사 파송과 비전은 듣기에는 좋으나 무엇 때문에, 어디에서, 어떤 일들을 구체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기초적인 설명도 없는 매력이 없는 비전이다. 선교사 숫자는 700만이나 되는 교포를 지구촌으로 흩어 놓으신 주님의 섭리와 역사의 흐름을 읽으면 새로운 대답이 있지 않을까? 시대를 멀리 내다보고 흘러가는 세계의 정황을 바로 판단하며 자신의 능력과 위치를 알고 고민하여 내어 놓는 비전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와 세계도 감동할 수 있는 비전이어야 한다. 비전이 선명하지 않으면 좋은 전략도 나오지 않는다. GMS를 끌고 갈 비전나리는 어디 있는가? 잔 머리나 굴리는 지도자로는 GMS를 끌고 가지 못한다.
셋째, 정책이 흔들리고 있다. 선교정책은 시간과 환경에 따라 다소의 수정도 필요하고 융통성 있는 시행도 중요하다. 그러나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입안한 정책이 되지 못하고 일시적인 필요나, 생각에 따라, 눈앞에 당면한 문제를 가지고 세운 정책이 아닌지? 선교의 경험이나 지식을 떠나서 상식과 전통에 충실한 교단 선교부 지도자들이 몇 번 토론하고 세운 정책이 아닌지? 그래서 자꾸 바꾸어야하고 심지어 상호 충돌되는 정책이 아닌지? 여기다 정책 시행자를 신뢰까지 할 수 없다면 오히려 정책이 없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많은 현장이 혼란하고, 팀 선교가 힘들며,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선교정책이 취약하거나, 정책 부재와 같은 현상에서 기인한다. GMS 선교사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너무 규제 없이 활동을 하고 있다.
넷째, 주된 전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없다. 기도와 연구가 부족한 결과다. 그래서 전략에서 조차 매우 헌신적이나 매우 보수적이다. 서구 선교사들이 쓰다가 버린 전략을 금과옥조로 충성스레 사용하고 있다. 보고서를 읽어보면, 사역자 보조 (Subsidy) 나 예배당 지어주기 같은 전략은 GMS의 주 무기이다. 네비우스 원리를 강조 하면서도 사랑이 넘쳐서 지원하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자는 선교사만이 아니고 후원교회가 앞장을 선다. FTT를 본부에서 분주하게 연구하고 홍보하고 있으나 현장에서는 용어를 이해하는 선교사도 드믈 정도로 후진 선교감각을 가지고 있다. 하루 속히 참신한 선교전략 개발이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최소한 현대 선교의 흐름을 탈 줄 아는 일부터 서둘러야한다. 부지런히 국제적인 선교 모임에도 참여하고, 자체적으로 연구하고 기도하여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한다. 선임 선교사들이 앞장을 서야할 분야이다.
다섯째, 정책적 문제이나 사역팀 개발이 시급하다. 복합적인 이유 (선교 신학, 비전 등등)로 GMS의 사역은 대부분이 개인사역 (Individual Play)으로 흐르고 있다. 한국 선교사를 향한 모라토리움의 소리가 현장에서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원인은 대부분 개 선교사들의 실수와 무지 그리고 열심에서 찾을 수 있다. 빨리 팀 선교화, 최소한 선교사 사이에 교통정리 정도는 되어야 상호 충돌이라도 피할 수 있다. 개교회 중심의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교파 선교 구조가 이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GMS가 뼈를 깎는 반성과 결단을 해야 할 분야다.
여섯째, 국제적인 네트워크의 과제다. 나 혼자만 선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린 교회를 사용하시어 역사를 진행하신다. 앞서 달음질 하고 있는 선진 선교세력과도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현장에는 신구 선교세력이 공존하고 있다. GMS는 이들과 마주 앉아서 나누고 배우며 밀어 주어야한다.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을 마시며 한 목표를 향하여 함께 달음질 하고 있다는 정신을 가지고 서로 도와주는 시스템을 개발해야한다. 나의 선교가 아니고 우리의 선교, 나아가서 주님의 선교에 충성해야 한다는 과제는 GMS 선교사들의 큰 숙제다.
마지막으로, 선교사 계속 교육과 같은 방법으로 앞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에 가장 민감해야할 선교사들이 사역에 도취하여 너무 바쁘다. 주님이 원하는 일인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인지 분간을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 앞에 서서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같이 듣는 일은 주님의 일에서는 기본이다. 함께하는 모임이 필요하고 기도 시간과 연구할 환경이 급하다. 중견 선교사들 중에서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려 모이는 것은 고무적이다. 지금은 교회와 본부 그리고 선교사들이 계속교육의 필요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투자해야 할 중요한 시점이다.
V. 나가는 말
2천년동안 계속되어온 사도행전 29장에서 GMS 100년사는 자못 의미 깊은 있는 한 장이었다. 한 세기동안에 GMS는 주어진 선교사역을 성공적으로 잘 감당 하였다. 한 민족을 향한 예루살렘 선교에서 한 세기 안에 민족 복음화에 큰 획을 그었다. 이웃 사마리아 선교는 아마 비서구 교회에 좋은 모델이라고 소개하여도 좋을 것이다. 현대 서구선교와는 반대로 물이 거꾸로 흐르듯, 대국인 중국에게 소국인 한국인들이 복음을 역(逆)으로 잘 전했기 때문이다. 땅 끝 선교에서도 좋은 본을 보였고, 적어도 출발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나아가 세계 복음화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하여 가고 있다.
이제 마지막 선교시대를 맞이하였으니, 오늘의 GMS 사도들도 세계선교의 선두 주자답게 성령님께 인도자 자리를 맡겨 오늘의 사도행전 29장을 아름답게 마감하여 가야한다.
참고자료
강승삼: 한국 장로교회와 해외선교 현황 및 선교 정책적 과제와 전망, “총회 90년사” 미출판. 선교 행전 (I, II, III). 총회 선교부
곽안련: 장로회 사전휘집 (상권). 서울, 조선 전도지, 1917
김활영: From Asia to Asia, Manila, 1994/ GMS 총회 보고서 (1998-2002)
박기호: 한국교회 선교 운동사. IAM, Pasadena, 1999.
전택부: 한국교회 발전사. 서회, 서울, 1991.
조동진: 민족과 종교, 별. 서울 1991
차재명: 조선 예수교 사기. 신문로교회. 서울. 1926.
GMS: 회의록 (1998-2002)
총회: 총회 회의록 (1912-2005)
각주
- 1한국교회 선교사 시대구분에서, 박기호는 제 1기를 이기풍의 출발부터 방지일의 귀국 까지 (1907-1957), 제 2기를, 1956년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최찬영이 은퇴하던 때까지 (1956-1991), 제 3기로, 김의환이 파송되든 해부터 현재까지 (1968-현재). 한편 신홍식은 태국에서 회집한 선교대회에서, 태국선교로 시작된 현대 선교사를 10년 단위로 세분하여, 시작 전의 암흑기(1945-1955), 여명기(1955-1965), 태동기(1965-1975), 진흥기(1985-1995)로 나누었다. 강승삼은 개척기 (1907-1937), 침체기 (1938-1963), 확장기 혹은 사사시대 (1964-1990), 선교협력 및 정책개발시대 (1991-현재) 의 4시기로 나누었다.
- 2물론 한 세기를 앞서 천주교회가 북경을 거쳐서 한인에 의하여 전파되어 활발한 전도와 성장이 박해와 순교의 와중에서도 이루어져 천주교회는 존재하고 있었다. Karl Gutzlaff나 Robert Thomas 같은 선교사에 의하여 복음의 소개나 스쳐지나가듯 하여 개신 교회가 전하여 졌다고 할 수 있으나 교회가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 3GMS (Global Mission Societ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는 장로교 합동측 해외 선교 기구로써 1998년에 총회 선교부를 재편한 것이다. GMS의 전신은, 1901년에 장로교 공의회 평양 시찰 안에 전도 위원회(Mission Committee)로 출발하여, 1905년 장로교 공의회 전도 위원회, 1907년 朝鮮 예수고 長老會 獨老會 傳道委員會 (Executive Committee of Foreign Mission 위원장 길선주), 1940년 총회선교부로 (Foreign Mission Board 부장 최지화) 명칭이 변경되어 왔다.
- 4만주에서 개종한 한인 청년들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부의 John Ross는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고 1882년에 심양에서 출판하였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처음으로 선보인 한글 성경이었다.
- 5Underwood를 뒤따라서 호주에서 Davies 남매(1889년), 남장로교 선교부의 Tate (1892년),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McKenzie (1894년) 등이 공식 선교사로 속속 입국하여 본격적인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 6조동진은 민족수난기였던 1905년에서 해방 시까지 40년 동안에 당시 전체 한민족의 삼분의 일 이상이 한 반도를 떠났다고 하였다. 주로 만주(500만)와 일본(200만)으로 떠밀려갔으며, 한반도 안은 마치 애급과 바벨론 포로 시절과 같았기 때문에 유례가 없었던 이 대 민족 이동 사건을 한민족의 출애굽으로 비유하였다.
- 7총회록과 기타 관련된 각종 문헌들에 나타나는 GMS 파송 선교사(혹은 전도목사)들은 145명 이상 되며 이들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활동 하였다.
- 8이때에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자 만주로 피난을 가서 신학교육을 하고 있던 박형룡, 박윤선도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와 나중에 평양신학교의 후신인 총신에서 교수하게 된다.
- 9그들 중에는 김이곤(1922), 오택환(1926), 박병훈(1940), 김길창(1929), 김치선(1936), 배신환 등도 포함되어 있다.
- 10최관홀은 박해에 못 견디고 정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러자 그를 GMS는 파면을 하였다. 그 후에 모교회로 다시 돌아 왔지만 배후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 11우즈베키스탄을 위시하여, 카자크스탄, 타지크스탄, 키르키즈스탄과 같은 신생 국가들이다. 이곳에 흩어진 교포들은 스탈린 시절 시베리아에서 강제 추방당한 자들이다.
- 12중국 네 번의 선교 기회가 있었다. 제1기(635-900?)눈 당대에 Nestorian 선교사 Alopen에 의해서고, 제2기 (1245-1368)는 몽고 제국시대로 문을 연 선교사는 Franciscan 의 John of Plano Carpini 이었다. 제3기 (1583-1774)에는 Jesuit Society가 활약하고 Xavier이 중국 땅에 상륙하였고 Mateo Ricci가 본격적으로 활약하였으나, Clement XIV가 Jesuit Society를 폐쇄함으로 자연 철수되었다. 마지막 기회(1802- )는 개신교에게도 왔다. Morrison이후 다수의 선교 단체들이 입국하였다. 모택동이 중원을 장악함으로 잠시 공식적으로 문이 닫혔으나 안에서는 외부 선교사가 없이 중국교회 스스로 활발하게 선교하였다.
- 13외지 전도국의 위원장은 길선주였고, 위원은 김찬성과 박태로, 그리고 William Hunt는 북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현지 교회와 산동주재 미국 장로교 선교와 협의로 내양이 결정되었다.
- 14중국은 500명 가까이 그리고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러시아 등에는 각 나라마다 100명 내외의 선교사를 배치하고 있다.
- 15Ralph Winter는 1980년 Edinburgh 선교대회에서 현대 선교 200년을 3시대로 구분하고 1기나 2기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활약하던 시기이나 3기에 해당되는 2차 대전 전후부터 지금까지는 비서구 선교사가 주축이 되는, 즉 남반구 시대가 될 것을 내다보았다. 세계전역 즉 모든 족속으로 뻗어나갈 것을 예상하고 숨겨진 족속에 집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새 천년을 마지한 지금은 복음적인 신자들이 비서구가 서구보다 훨씬 많아 졌으며, 비서구 선교사가 서구 선교사의 수를 훨씬 능가하고 말았다,
- 16선교 관련 국제적인 집회가 한국에서 모이기를 시작하고, 나아가서 그런 집회를 주도하기까지 한 것을 들 수 있다. 1990년 Asia Missions Congress가 충현교회에서 모였고, 1995년의 GCOWE도 충현과 사랑의 교회 등에서 모였으며,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재정과 지도력으로 추진된 국제선교대회였다.
- 17모든 민족 선교회, 필리핀 선교후원회, 형제 선교회, 태국선교후원회, 브라질 선교회등 수많은 선교 후원기관이 힘을 결집하는 팀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소규모 선교단체들은 선교회 기능을 상당히 가지고 독립적으로 선교사와 사역을 관리하고 있다.
- 18국제적인 단체로 AIM, SIM을 비롯하여 SIL, OM, OMF, WEC, 국내 자생 단체로 AFC, GMP, GP, HOPE, KHE, MET 등으로 전체 선교사의 10% 이상을 파견 사역하게 하고 있다. 그중에 SIM과 GP가 가장 오랜 동역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선교사 수도 많다.
- 191980년에 총회 본부에 선교국을 두어서 선교행정의 전문화를 기하였으며, ’90년대부터는 선교사 출신 전문인이 국장을 맡았고, 1998년에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상비부서인 선교부를 총회 세계 선교회로 (GMS) 재편하여 전문 선교기구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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