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이집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콥틱교회와 이슬람을 알아야 한다. 이집트에는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먼저 시작되었다. 이집트는 초대 기독교 교회사의 중심무대가 되는 나라였다. 특별히 알렉산드리아 도시는 초대 기독교와 세상 학문의 중심무대였다. 콥틱교회가 시작된 곳도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다. 콥트는 이집트의 토착적인 기독교이다. 무슬림이 들어오기 전까지 토착교회로서 알렉산드리아의 구두 수선공 유대인의 개종으로 시작된다. 그로인해 그들의 가족에게 복음의 씨를 뿌렸고, 그들의 가족이 마가 (St. Mark) 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교회가 된다
그 후, 600여년 기독교 국가로 오는중, 종교 지도자들의 타협으로 주후 641년경, 아므르 빈 알 아스 (Amr bin al-As)에 의해 무슬림이 이집트를 정복한다. 콥트인들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로마제국의 잔인함을 경험하였고, 639년 두 번째 칼리프 ‘Umar ibn al-Khattab’ 지배 아래에서 마가를 추종하는 콥틱의 신앙을 따르는 수많은 자들이 학살됨으로 인해 콥트인들이 이슬람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Cyrus는 ‘콥트 사람들 모두의 죽음은 기꺼이 드리는 생명이었고, 현저한 겸손의 행위임이 증거되었다’ 라고 하였다. 콥트인들은 무슬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먹지도 않았고, 그들의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1 콥트인들은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굴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죽음의 고통까지 받아들였다. 콥틱교회 역사에서284년은 하루에 60여 명이 넘는 순교자들이 있던 해이다. 이런 이유로 주후 61년에 콥틱교회가 시작되었으나, 공식적인 콥틱 교회의 원년을 284년으로 기념하고 있다. 2
특별히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가 당면했던 문제는 ‘세속정부에 대한 입장 규명’ 이었다. 역사는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정부에 전혀 관여치 않고 은둔하는 것으로부터,그에 관한 정부의 목적과 목표들에 부합한 경우 등의 그에 관한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Orthodox Copts’ 의 정부 특히 이슬람 정책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입장해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3
저술가로 Abu al-Makarim 4 과 15세기 이슬람 역사학자 al-Maqrizi 5 가 있다. 정부에 대한 Orthodox Copts 의 입장은 정부가 교회에 부여하는 것보다 교회의 정부의 의존적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슬람의 ‘Dhimmis’ 6 정책: 이집트 정부의 Orthodox Copts에 대한 정책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콥틱교회 이해를 돕기 위해 콥틱의 어원, 역사적 배경, 그리고 이슬람 치하에서의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신약성경을 기반으로 한 그들의 주지하는 바를, 첫째 정부도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임에 대해 (로마서 13:1-7), 둘째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 (Apocalypse 13), 세째 정부를 받아 들이는 입장(누가 7:2-10; 마태 22:16-22) 등의 세 형태를 분류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콥틱의 어원
콥틱(Coptic) 의 어원은 그리이스 (Greek)어 ‘Egyptos’ (이집트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를 부를때 쓰인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가 이집트에 들어온 것은 B.C. 7세기경이다. 이것은 이집트 선조들이 쓴 ‘HA-Ka-Ptah’ (Ptah 의 영혼의 집이라는 의미) 의 뜻과도 같은 의미이다. 이집트 사회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신을 높이 숭배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콥트(Coptic)와 이집트인(Egyptian) 은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모든 콥트인들은 이집트인들이지만, 모든 이집트인들은 콥트인들이 아니다. A.D.641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들어온 무슬림들이 이집트 지역을 정복했을 때, 그들은 이집트인들은 그리스어로 (ai)gupt(ios) 라고 불렀다. 이 의미는 바로 이집트인들과 순수 무슬림들과 구별되어진다는 뜻을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보면 주후 2세기말에 기독교로 개종했던 원주민이었다. 콥틱(Coptic) 이란 용어는 “Agiptus” 라는 용어로부터 파생한 것인데, 이것은 콥틱의 원래 명칭을 그리스-로마식으로 발음한 것이고 후에 원주민에 의해 “Gyptos” 수정하였다. 7 7세기의 아랍-이슬람 침략 이후 이 명칭은 나일 계곡의 원주민을 지칭하기 위해 “Qubt” or “Copt” 라는 아랍식으로 되었다. 8 그때부터 “Copt” 란 용어는 이집트인을 순전히 인종적 차원으로부터 이집트인 중 기독교인을 일컫는 인종-종교적인 의미가 되거나, 이집트 정교회나 에티오피아 정교회에 의해 행해지는 콥틱교회의 예배의식을 일컫는 종교적 용어로 변했다.
콥틱교인은 스스로를 고대 이집트인의 직계후손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이집트인’ 이라 부른다. Elliot Smith 는 고대 이집트인과 콥틱인과의 신체적 차이의 비교연구에서 고대 이집트인과 현재 콥틱, 즉 그들의 후손과는 차이가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다. 비슷한 결론이 현대의 신체적 특징과 고대 이집트의 신전벽화나 조각의 인간 모습 사이의 놀랄만한 유사점을 발견한 ‘Vivant Denon’ 에 의해서도 내려졌다.
2. 역사적 배경
이집트 역사의 지난 13세기 동안 상호작용을 해왔던 두 인종적 그룹인 무슬림과 콥틱을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이 두 관계성의 성질은 아랍 속담에서 “나의 형제들과 나는 나의 사촌에 대항해서 합쳤고, 나의 사촌과 나는 이방인에게 대항해 합쳤다” 에 의해서 묘사될 수 있다. 이런 연합은 인류학자들이 일컫는 ‘보안적 대립’ 의 형태이다. 이 말은 이 연합이 친족과 친척이나 결혼관계로 인한 인척관계의 차이에 근거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친 가족(이슬람), 친족(콥틱). 아랍인은 한 가족이고 콥틱은 친척임을E. L. Peter 는 그의 Bedouin In Cyrenaica 연구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아랍 속담은 이론적인 근거는 없지만 다소 대중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무슬림과 콥틱인의 관계는 사실상 이 속담을 따른다. 이 두 인종적 집단의 상호관계는 공동목표인 이집트의 국가적 복지와 공동의 위험이 식민지 세력에 대항하는 일치감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과 콥틱인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은 또한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대립을 나타내고 있다. 즉 외국인의 침략에는 기독교와 이슬람은 하나가 되어 방어하게 되고, 자신들의 삶인 종교, 경제, 사회, 정치 영역에서 다른 의견일 때 대립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이집트 무슬림의 인구는 얼마의 아라비아 침략자의 후손과 아랍인과 결혼해 개종한 콥틱교인, 그리고 다른 외국 무슬림 침략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집트의 무슬릠들은 스스로를 아랍인과 고대 이집트인 모두를 조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초기 기독교는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성 마가 (St. Mark) 9 가 주후 61년에 로마제국 네로 황제의 통치지역인 이집트로 들어 온 것으로부터 이집트 기독교 역사가 시작한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초기에 기독교를 새로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콥틱교회는 세계교회 중에서 아주 역사가 오래된 교회 중에 하나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주후260-340) 에 따르면, 전도자 마가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콥틱교회는 자기들의 교회 원년을 서기 284년으로 한다. 이 해는 디오크레시안(Diocletian)이 로마황제로 즉위한 해이다. 교회역사에서는 이 황제의 통치기간을 ‘순교자의 시대’라고 부른다. 극심한 교회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집트 교회의 의하면 이 시기에 하루에60여 명 이상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고 한다.
콥틱교회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교회다. 비쟌틴 제국의 핍박을 비해 사막으로 도망하여 은둔하여 신앙과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신앙의 유산을 이어오게 한 것이다. 또 이들이 콥틱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은 오늘날 성경사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콥틱교회는 세계교회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서기 451년 칼세돈 (오늘날 터키지역)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콥틱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두 가지를 다 주장했던 반면, 콥틱교회는 신성만을 더 강조한 결과다. 이로 인해 콥틱교회는 세계교회의 주류에서 멀어지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콥틱교회는 서기 641년 이집트가 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한 후 이슬람교 밑에서 많은 역사의 풍상을 겪어오면서도 오늘날까지 그들의 신앙을 굳게 지켜오고 있다. 콥틱교회 안에 깊은 영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3. 이슬람 치하에서의 이집트 기독교인
콥틱교회는 오랜 역사 속에서 고통과 아픔의 핍박 가운데서도 자신의 신앙을 굳게 지켜온 교회이다. 정부의 콥틱인에 대한 정책들이 핍박과 차별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들의 신앙을 지키고 있다.
정부의 종교에 대한 정책과 입장은 이론상 핍박 :persecution’ 차별화: sufferance 그리고 자유: freedom 의 형태로 분류해 볼 수 있다. 핍박은 이슬람으로 강제 전향케 한 시도를 포함한다. 결과로 이슬람으로 개종을 해야 했거나 개종을 거부한 사람은 학살되어야 했다. Coptic Synaxarium 10 에 이슬람 통치아래 순교한 명단이 있다. 11 차별화하는 응당의 댓가, 예를 들어 세금을 부과하거나 특정 권리를 포기하는 것 등의 조건으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종교적 자유는 교회와 정부의 엄격한 분리에 기초한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이론으로 이슬람과 기독교를 엄격히 분리하는 개념이다. 이슬람법에 의하면, Dhimmis (딤미)는 이슬람 국가에 존재하는 비 무슬림 공동체를 의한다. 이는 ahl al- Kitab’ 경전의 백성 뿐 아니라, 배화교도 (fire-Worshipers) 를 포함하였다. ahl al- Kitab’ 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사마리아인과 Sabian 등 경전을 소지하는 모든 비 무슬림들을 일컬었다.
“무함마드를 따르는 이들과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과 Sabaeans 등 알라와 최후의 날을 믿고 바른 행위를 하는 자들은,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반드시 응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며, 그들에게 두려움이나 애통함이 엄습하지 않을 것이다” 12.
이집트에서의 ‘dhimmis’ 는 Orthodox Copts 를 말하며, 이들을 Poll 세나 재산압류 혹은 학대로부터 보호라는 명목하에 각종 세금을 내야 했다. 아랍인에게 군복부는 부과되어지는 짐이라기 보다는 자부심에 관여했던 바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기독교인에게 군복무를 대신해서 세금을 내게 한 것이 혜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군복무를 대신해서 세금을 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차별화는 집권자의 취향에 의해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아랍정권이 갖는 특정으로 규정할 수 있다. 부녀자와 가난한 이들, 소경과 병에 걸린 자들, 정신 이상자들, 실직자, 그리고 적어도 초기에는 수도사들에게까지Poll 세가 면제 되었었다. 교황 Alexander II (705-730 A.D.) 때, ‘Abd al-Aziz 의 아들 ‘Umar’ 은 면세 대상이었던 수도사들에게도 무슬림이 되지 않는다면 poll세를 내도록 조치했다.
무슬림 정권 초기의 이집트 Dhimmis (딤미) 는 정권에 따라 빈번하게 변하는 조세제도 13 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러나 무슬림 치하의 Orthodox 콥틱인에게 부과되었던 가장 큰 부담이 정부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회 내에 존재하던 상부구조에 대한 책임과 복종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와 정부의 요구사항들이 자주 변경되었으므로,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정부 사이에서 그들의 충성을 선택해야만 했다.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막중한 세금이 부과되거나, 기독교 생활을 할 수 없도록 조치되어오곤 하였다. 이론적으로 이슬람 법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사유 재산권과 안전을 보장하고 있으나, 기존의 교회 외에 새 교회를 세우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동방교회가 7세기 중반부터 이슬람 지배 아래 있게 되자, 교황의 전제주의적 행사 (caesaro-papism) 나 교회의 권위주의적 정치 권력행사 (hierarchical clericalism)는 사라지게 되었다. 동방교회, 특히 콥틱교회는 정부에 대해 분명하고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 콥틱의 정부를 향한 태도는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급속히 치달았다. 정부와의 관계에서의 불분명한 태도는 수 세기 동안 변하지 않았으며, 종종 기회주의적 태도로 나타나곤 했다. 정책이라고 내세울 뚜렷한 특징이 없기 때문에 콥틱의 정부에 대한 태도를 일괄적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istory of the Patriarchs of the Egyptian Church 를 비롯한 몇몇 자료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신성기관으로서 이해, 둘째 견제의 입장, 셋째 중립적 이해관계 형성 등 정부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관계를 다음 세가지로 살펴본다.
3-1 신성기관으로서의 이해
바울서신은 ‘콥틱의 정부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이집트 기독교의 정부에 대한 순복적 태도는 태고적 그들의 조상적부터 견지되어 오던 태도였다. 파라오들과 왕들과 칼리프들은 내재되어 온 듯한 이집트인들의 ‘복종심’의 혜택을 누려왔다. 로마서 13장 1-7절의 바울의 훈도는 이집트인에게 기독교 이전 시대부터 주지되어 오던 바였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 파라오 는 출생부터 신적 권위를 입어온 것으로 믿어져 왔으며, 파라오의 강령은 신적 권위를 내포했다.
Bashmurites(기독교의 한 분파)가 정부의 억압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52번째 교구장(830-849) Joseph 은 “권위에 복종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는 것이며, 그들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 라고 하며, 로마서 13장 2절의 사도바울의 훈계를 근거로 그들을 엄히 질책하고 집회를 무산시켰다.
Hisham (724-743)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무슬림 지도자로 여겨졌다. 콥틱인들은 그를 위해 기도했으며, 하나님은 그가 치리한 22년의 시대를 번영케 하셨다. The History of the Patriarchs of the Egyptian Church 연대기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는바, amir al-Guyus 가 권좌에 있었을 때 교황과 비숍은 그의 말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Al-Guyus 시대에는 교회에 대한 정부의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al-Khandaq (카이로 외곽) 수도원의 아르메니아 교회와 시리아 교권을 행사하는 쪽은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정부쪽이었다.
7세기 초 교의회와 평의회가 당시 권력자였던 Abd al-Aziz 의 승인을 받지 않으 채 George 를 교구장으로 선출하였었다.
무슬림이 정권을 이양한 첫 몇세기 동안 Greek Orthodox 와 Copts 는 정부 기관에 그들의 요구와 주장을 알렸다. 정부는 특히 호시 탐탐 착취의 기회를 노리며 재정업무에 깊게 관여하였다. 아랍 정권직 후 교계의 임직은 정부 지도자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amir의 명령 없이는 비숍을 임명할 수 없다” 고 자신의 처한 입장을 밝혔다. 그래서 야망 있는 사제들은 Abba James (819-830) 가 자신들을 비숍으로 임명하도록 교회가 아닌 정부 관리에게 뇌물을 건넸다.
3-2 정부에게 교회의 반대 입장: 강경입장
이집트 기독교인들이 정부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랐던 것은 아니다. 핍박에 처할 때 콥틱인들은 계시록 저자의 진술대로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계 13장10절) 는 고전적 입장을 택하지만, 세상 정부에 대해 원래 악한 존재이고 사악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랍 정복자들에 대해 비잔틴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 준 것으로 여긴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새 주인도 과거의 억압했던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Nikiou Bishop John 등은 “아랍 정복자의 굴레는 이스라엘이 고대 파라오들로부터 받았던 것 보다 더 비겁하다. 이집트의 많은 가축과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자기 백성은 홍해을 건너게 하신 때처럼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의 빛이 임할 것이다.”14 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를 파괴하고 면세 대상이었던 수도사들에게 poll 세를 부과한 ‘Umar Ibn Abd al-Aziz (717-720) 를 ‘적그리스도’ 라고 불렀다.
Al-Qasim (8세기) 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그 소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726년과 773년 사이에 일어났던 봉기들이 실패로 돌아간 예를 제외하면, 반정부 콥틱의 입장은 신학적 탄핵 등으로 스스로 제한했다. 왕이나 칼리프들의 억압적이며 차별적 칙령들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대한 그들의 불만은 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나타나긴 하였어도 체계적이거나 일관성 있는 형태로 드러나진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Heraclius 황제의 때에 어떻게 아랍 가운데 거짓 선지자가 일어났던 과정을 연구한 Damascus의 John 처럼 이슬람을 기독교 이단의 한 분파로 여기고 몇 콥틱인들이 기독교 변증서를 펴낸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콥틱인들은 이슬람 정권에 순복했던 반면 이슬람의 가르침은 혐오하였다. 15 핍박 받을 때에 기독교인들은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교회를 파괴하는 것에 대해 저명한 기독교의 인사들은 al-Mu’tazz (866-868) 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성직자들의 대처는 대개 소극적이었다. 긴박한 두려움의 상황이 벌어지면 대주교는 숨을 곳을 찾아 떠나고 비숍들과 제사장들(the priests)는 사제복을 벗고 평신도 복장으로 차려 입었다. 16
3-3 정부-교회간 상호 존중의 경우
앞서 언급하였듯이 정권 장악 직후의 이집트의 이슬람 정권은 콥틱인들에게 비쟌틴 치하에서의 압박으로부터 오히려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신뢰감을 조성시켰었다. 이집트를 점령한 ‘Amir ibn al-As’ 장군은 이슬람 치하에서 더 좋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38번째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대 주교 Benjamin 에게 편지하기를, “당신이 거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도록 우리가 보호해 주고 안전하게 지켜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유지되고 당신의 교회의 사무가 정상적이 되도록 교인들도 교구장들도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면 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서쪽으로 가서 Pentapolis도 이집트처럼 해방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돌아오겠으니, 그때 당신의 요구를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17
상호 존중의 태도는 수용하는 입장의 태도만이 아닌 ‘보다 적극적 자세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이 전제 되어진 일’ 이었다. 그러나 그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분명하게 규정할 수 없었으며, 교회가 사회적, 경제적, 법적 문제 등에 연류될 때, 정부는 요청에 의해서였건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였건 교회 내무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Simon I 세는 42번째 알렉산드리아의 대 주교 (689-701) 가 정부와의 협력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한 노력에 대해 “기독교인과 무슬림간에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콥틱은 정부에 대한 존중을 공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보면 2세기말경 그리고 5세기까지 비록 콥틱이 로마인과 이방 황제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지만, 기독교는 이집트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주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핍박은 끝나고 기독교화 과정은 가속되었다. 처음 4세기 동안에는 콥틱과 교부와 집사와 학자들이 이교에 대항한 토론에서 강한 논증을 발전시켰다.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콥틱 교황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저작된 잘 알려진 ‘Canon of the creed’는 콥틱의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단성론으로서 1세기 성 마가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 이 후 변함없었다.
1955 년 모든 무슬림 Sharia 와 콥틱 Millet 법정이 폐지된다. 콥틱교회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강조하였다. 이 원칙은 아타나시우스 (328-373) 에 의해서 강조되고 확립되었는데, 그는 콘스탄틴 황제에게 “교회의 일에 간섭말고 교회사건에 관계된 어떤 명령도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국가를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의 일을 책임지게 하셨다.”고 말했다.
최근 콥틱과 무슬림은 외부적인 압력과 내부적인 것 (극렬주의자들)으로 긴장해왔다. 많은 식민지 세력들 (프랑스, 영국, 오스만, 터어키, 그리스, 로마) 은 두 인종 구룹인 콥틱과 무슬림을 다루는데 실패하였다. 지난 온 이집트의 역사는 콥틱과 무슬림이 외부세력에게 이집트의 이익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던 것을 보여준다. 두 그룹 모두 이집틀 위해서 싸웠고, 이집트의 독립을 원했다.
그러나 이집트 내에서 선교사들에 의한 외부적인 압력은 콥틱과 무슬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오게 하였다. 콥틱은 근본적으로 서구의 선교정책에 반대했다. 그들은 식민주의자들의 지원을 받는 선교사들과 선교정책을 외부 세력으로 보고 반대했다. 선교사들은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에게만 독립권을 가지게 하였다.
비록 선교사들이 괄목할 만한 수의 무슬림들을 개종시키는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은 선교사들을 이슬람과 국가 안정을 위협하는 세력으로서 불신을 가졌다. 무슬림 지식인들은 국가교회에 속해 있는 콥틱을 외부세력에게서 영향받는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와 로마 가톨릭과 구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무슬림들은 선교사와 그들을 따르는 콥틱 사이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특별히 대립과 갈등의 시기에는 선교사들은 그들의 불신을 콥틱에게 전가한다. 18
Al-Ikhwan, Al-Muslimin (The Muslim Brotherhood) 과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초기 이슬람 방식의 삶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 극단주의들의 저작물들 속에서 무슬림 형제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심한 적대 감정인 존재가 되고 있다. 형제단의 40-50개의 조직은 자신들의 운동을 반대하는 사회지도자나 요인을 테러하고 암살하며 그들을 대적하겠다는 선서를 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있다. 형제단의 정치적 야망은 1960년대 나세르 통치시기에 탄압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이슬람 근본(보수)주의자들과 그런 단체의 열정은 콥틱으로 하여금 이슬람화된 이집트 안에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하여 매우 불안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또 다른 극단주의자들 단체로 Gam’yut al-Takfiv wa Ii-Higra, Salafi가 있다. 그들은 최근 무슬림 생활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사회고위 인사들을 암살하는 테러활동들을 하고 있다.
콥틱교회 또한 그들의 비밀단체를 가지고 있다. Al-Umma, Al-Kibtiya 는 Al-Ikwan(형제단) 조직에 대항하여 형성된 콥틱의 보수주의 단체이다. 1954년 나세르는 이 단체를 해산 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의 저작 출판물들이 이집트의 국가적 연합에 위협요소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나세르는 Al-Ikwan을 탄압했으며, 그 조직이 해산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세월 동안 무슬림과 콥틱 사이에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아슈우트 등에서 유혈 폭력사태가 있었다. 약간의 무슬림이 콥틱으로 개종한 사건과 대통령의 동의 없이 교회건물이 지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폭력은 여러 명의 콥틱교인의 죽음과 교회들이 불타는 심각한 피해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콥틱의 견해를 발표하기 위한 몇 번의 회의가 소집되었고, 1976년 알렉산드리아의 한 콥틱회의에서 그들의 주장을 발표되기도 했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주후 641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와 무슬림의 관계는 같은 맥락으로 상호 보안적 대립관계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기독교인들과의 관계는 협력, 충돌과 부딪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에도 기독교인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오는 불이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과의 관계 형성을 개발하고 나아가야 되는 숙제로 남아있다.
결론
주후 7세기 동안에는 콥틱에 대한 아랍 통지자들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우호적이었다. 무함마드의 몇몇 발언이 무슬림으로 하여금 콥틱을 잘 대하도록 하였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콥틱을 잘 대하라 그러면 너희들의 적과 싸울 때 협력자가 될 것이다. 콥틱은 삼촌이고 친척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가 적과 싸울 때 너희 종교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의 땅과 알라에게 예배를 위한 세속적인 일까지도 도울 것이다. ” 그럼으로 이슬람 시대에는 콥틱에 대해 완전한 시민으로서 좋은 대우와 함께 상호이익, 긍정적 태도로 주후 641년에 시작했다. (이때 콥틱교인들은 로마의 핍박가운데 매우 지치고 힘들어 있을 때였기 때문에 무슬림들의 타협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콥틱지도자들과 무슬림들의 타협으로 인해 지난14세기 동안 핍박과 어려움 가운데 무슬림과 기독교는 상호 보완적 대립관계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랜 시간 이러한 맥락으로 두 종교는 이해와 갈등, 부딪침과 화해 등이 연속적으로 거듭되면서 그때 그때의 정치와 사회의 상황에 따라 변화되고 있다. 우리는 콥틱과 무슬림 사이의 역사와 종교의 많은 차이점으로 두 인종적 영역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이 영역들은 실생활에 존재하며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한다.
2011년1월25일 이집트에서 쟈스민 혁명이 일어난 후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시위로 인해 기독교와 무슬림의 긴장이 지속되고 있다. 쟈스민 혁명이 후, 무슬림 자신들의 종파 (강경파, 온건파, 자유주의 등) 에 따라 각 종파의 의견과 주장을 나타내는 갈등을 화풀이하는 대상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온건파 무슬림들을 옹호해 주는 사람이 기독교인들이라 생각하여 교회와 교인들이 하는 사업체를 불사르며, 지도자들을 죽이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기에 안타깝다. 기독교인들이 피해자가 되는 것이 억울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특별히 약 20여 년 전부터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일들이 시작됨을 필자는 영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준비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슬림들을 가슴에 품고, 그들을 사랑하여야 하고, 함께 가는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 어떻게, 무엇으로, 언제, 어떤 지도자를 통해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그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면서 고민하게 된다.
각주 —————————————————————————————
1. Sohirin Mohammad Slihin Copts and Muslims in Egypt: A Study on Harmony and Hostility ,, 1991. p.7
2. Ibid., p 57
3. The most recent informative study on present Christian-Islamic relations in Egypt is Cornelis Huslman. The freedom of Christian in Egypt : A new approach of reporting religious freedom in an Islamic Context .(Aschen: Missio, 2007)
4. B.T.A. Ebetts , The Churches and Monasteries of Egypt and Some Neighbouring Countries Attributed to Abu Salh the Armenian (Oxford: Clarendom Press 1895)
5. Wustenfeld, F. Maqrizi’s Geschichte der Copten. Gottingen 1845. Also as addendum in Evetts, op. cit and S. S. Malan. A short History of the Copts and of Their Church (London, 1873)
6. 딤미는 무슬림이 아닌 다른 종교인들에게 개인적인 세금 (jizya) 을 지불함으로 인해 무슬림 지역에 거하게 되는 의무이며 국가로부터 그들의 보호 아래 인정해주는 것.
7. Kamil, Jill Coptic Egypt History and Guide (Cairo, Egypt 1987/1990
8. Joseph, Suad and Barbara L.K. Phillsbury (ed.) Muslim-Christian Conflicts (Cairo, Egypt )
9. St. Mark레위 족속에 속해 있는 아프리카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구레네(지금의 리비아지역)에서 베르베르인들의 점령 이후 모든 재산을 빼앗겼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 이후 예루살렘으로 아들 마가요한 (John Mark; 행12:12,25, 15:37)과 함께 이주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티어를 첨가한 언어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은 매우 종교적이고 예수님과 자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친척인 바나바(St. Barnabas)와 그의 아버지의 친척인 베드로(St. Peter)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늘 매일 일찍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녀의 다락방이 세계에서 첫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되었고 그곳은 예수님 자신이 성찬식을 시행한 장소이기도 했다. (The Holy Eucharist:akar14:12-26) 콥틱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인 측면에서의 교회의 출발을 성 마가( St, Mark) 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와서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 첫 콥틱 주교가 된 것으로부터 본다.
10. Basset, Rene, Le Synaxaire Arabe Jacobite, Part Orient I, III, XVI, XVIL
11. The Synaxarium was compiled by Peter Bishop of Malig, between the last quarter of the twelfth and the first half of the thirteen century. O.H.E. KHS-Burmester, “On the date and authorship of the Arabic Synaxarium of the Coptic Church”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XXXVIII, 2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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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Sawtrus Ibn Muqaffa, History of the Patriachs of the Egyptian Church. 1943, vol.1, p.497
18. Joseph, Suad and Barbara L.K Phillsbury Muslim –Christian Conflicts 1978 Boulder Co: Westview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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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제목 : Copts and Muslims of Egypt
김신숙 선교사 : 애굽복음주의 신학교 교수, 애급선교센터 원장/ 학력: 총신대학 (BA) ; 성균관 대학교 사서 교육 대학원: (Diploma), 칼빈 신학 대학원 (Grand Rapids, MI) 기독교 교육학 석사(MA), 훌러신학대학원 (Pasadena, CA) 선교학박사 (DMiss)
사진: 콥틱십자가/ By Sagredo – 자작, CC BY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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