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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진 목사/선교사 사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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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진 목사/선교사 사역을 말한다 » 기고: 김하진(金河振) 명예선교사

김하진목사/선교사 사역 – 간단히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을 드릴 수 있다. 첫째는 목회 사역이다. 1965년 전도사로 시작하여 지금까지(2003년 12월) 목회자로 사역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였다. 둘째는 GMS 동남아시아 명예선교사로서의 사역이다. 2001년 11월 25일 20년 동안 담임목사로 사역하던 동원교회를 조기 은퇴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교회에서 GMS 동남아시아 명예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현재까지 선교사로서 교육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셋째는 東洋醫術로서 봉사하며 선교하는 사역이다. 2014년 11월부터 지금까지 중국(China) 인도(India) 태국(Thailand) 방글라데쉬(Bangladesh) 일본(Japan) 필리핀(Philipine) 캄보디아(Cambodia) 미얀마Myanma) 가나(Ghana) 호주(Australia) 괌(Guam) 사이판(Saipan) 등 여러나라에서 가르치는 사역과 동양 의술로 현지인과 한인들 그리고 선교사님들 천여 명 이상을 진료하며 선교를 하였다. 이 사역은 필자 자신이 모든 재정을 부담하며 무료로 봉사한 사역임을 말씀드린다.

목회사역

1. 전도사 사역과 군목 활동(육군 군목으로 3년간 사역)

김하진목사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라고 생각된다. 당시는 그 부름이 무엇인지를 인지할 수가 없었다. 단지 신비한 체험이라고 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때의 그 체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달았다.

1964년도 필자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는 총신이라는 학교가 용산역 앞에 있을 때이다. 당시에는 예과 본과 전수과라는 학과가 있었고 학생들도 몇 명이 되지 않았다. 예과에는 신학과와 기독교교육과가 있었다. 사당동 총신으로 이주를 한 것은 1966년도이다.

필자가 전도사로 첫 사역을 시작한 것은 신학교에 입학한 다음 해인 1965년부터이다. 서울 아현동에 있는 남아현교회(고 임순묵 목사)가 첫 사역지이다. 교회에서는 필자에게 성가대 지휘와 고등부를 맡겨 주었다. 필자는 누가 그 교회에 소개한 지도 모른채 부임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모른다. 교회에서 연락이 와서 간 것이다. 그런데 1년 동안 봉사한 후 필자는 우이동에 있는 우이중앙교회(고 박기풍 목사)와 그리고 1968년도에는 신촌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있는 신현교회(고 정석홍 목사)에서 유초등부 전도사로 초빙을 받아 봉사하였다.

당시 필자는 신대원 2학년으로 지금의 아내인 최경숙 사모와 10월에 결혼도 하게 되었고 생활을 위하여 상도동 숭실대학교 아래쪽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피아노학원을 개원하고 학원을 운영하며 학교에 다니고 생활도 하게 된다.

당시 필자와 함께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서울 시내에 8곳에 피아노학원을 설립하였다. 이를 위하여 충무로에 있던 삼익피아노사가 적극적으로 협력을 해 주었다. 이로 인하여 필자는 교회 사역을 그만두고 고 박윤선목사가 개척한 교회인 한성교회에 출석하면서 간접적으로 박윤선목사님을 도와드리게 되었고 1971년도에는 육군 군목으로 임관이 되어 3년 동안 화천지역에서 군목으로 활동을 하며 군선교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 결과 3번에 걸쳐 합동 세례식을 갖게 되었고 2458명(1차686명 2차1164명 3차608명)에게 세례를 주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2. 부교역자 사역

필자는 육군 군목으로 1974년 11월 말 육군대위로 전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충교회(고 이규일목사)의 요청으로 9월부터 대학부 지도목사로 사역을 하게 된다. 당시 필자는 상도동에서 피아노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학생들도 50여명이 되어 강사 선생님들을 두고 운영으로 하고 있었고 필자는 제대 후 수속이 되는 대로 미국으로 유학을 갈 계획이었기에 이규일 목사님이 전임으로 있어 달라는 요청을 받아 드리지 못하고 토요일과 주일만 봉사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2년 반 동안 있으면서 여성성가대도 지휘자로 사역하게 되었고 대학부와 함께 고등부도 맡아 봉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수유리에 있는 신일 중고등학교에서 교목으로도 봉사를 하고 있었다.

제대 후 미국 유학을 위한 비자 신청을 하였으나 미국 대사관에서 이유 없이 비자를 주지 않는다. 당시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이 필자의 유학길을 막으신 것이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충현교회의 부목사로 갑자기 부름을 받게 된다. 1977년 3월 초이다. 장충교회 이규일 목사님이 충현교회에서 수도노회 교직자모임이 있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충현교회에 가게 된 것이다.

충현교회는 필자가 군목으로 있으면서 대북방송선교를 하면서 대북방송용 테잎프 제작을 위하여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찾아 갔던 교회이다. 이런 이유로 친근감이 있는 교회였고 당시 고인이 되신 김창인 목사님이 약 10분 정도의 설교를 해 주시고 장로님들이 돌아가며 기도 순서를 맡아 주셨고 찬송 등 이렇게 하여 20분 정도로 방송용 예배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교회이다. 당시는 남북이 최전방 GP에서 대북 대남 방송을 할 때이다. 이를 이용하여 필자는 대북 선교를 위하여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큰 도움을 준 교회가 충현교회이다.

그래서 필자는 충현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사무실로 찾아가 사무장으로 수고하시던 고 이태규 장로님을 먼저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자주 만나 도움을 주시던 장로님이었기에 친숙한 사이였다. 그런데 장로님이 나를 보자 마자 필자에게 부탁이 있다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부목사 한 분을 소개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농담삼아 ‘내가 오면 안되나요?’라고 했다. 그야말로 나도 모르게 무심코 나온 말이다.

그런데 장로님이 반색을 하면서 김목사님이 오시면 아주 좋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시면서 서랍에서 백지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내어놓으며 지금 여기서 간단하게 이력서를 써 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유학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상도동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충교회에 교육목사로 시무하고 있었고 학교에서 교목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황을 하게 되었고 장로님께 오늘 하루 기도하고 내일 토요일 이력서를 갖다 드리면 안 되겠느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꼭 내일 이력서를 가져 왔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다음날 토요일 장충교회 대학부 모임이 있어서 가다가 간단하게 기록한 이력서를 이태규장로님께 드리게 되었다.

다음날 주일 예배를 마친 후 충현교회에서는 임시 당회로 모여서 필자를 부목사로 모시기를 결정을 했다고 하면서 오후에 이태규 장로님이 상도동 집으로 전화를 주셨다. 내일부터 출근하고 대 심방을 하라는 것이다. 대 심방이 이미 시작이 되었는데 한 지역이 담당 목사가 없어 필자가 내일부터 심방을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너무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어서 필자는 이장로님께 양해를 구했다. 우선 장충교회 교역자직을 사임하는 과정이 있으니 다음 주일날 장충교회에 가서 정식으로 사임을 하고 그 다음주부터 출근하겠다고 말씀들 드렸다.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서 장로님은 교회 근처 필동에 사택도 준비를 해 놓았으니 빠른 시일내에 이사를 하라는 것이다.

우선 상도동에 있는 피아노학원을 정리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이사하는 문제는 좀 여유를 달라고 말씀을 드리고 당분간 상도동에서 출근을 하면서 피아노학원을 정리하게 되었고 당시 그 돈으로 영동에 있는 AID아파트 두 채를 전세를 안고 매입을 하였고 얼마 후 교회에서 준비한 사택이 있는 필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얼마 후 강남에 새 성전을 지으면서 몇 분의 부교역자들이 영동으로 사택을 옮기면서 우리 가족도 서초동에 있는 무지게 아파트로 사택을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1982년 10월 동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게 되어 서초동을 떠나 구의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필자는 충현교회 부목사로서 한 지역을 담당하는 심방목사로서의 사역을 하면서 성경학원 담당 목사 그리고 음악목사로서 충현교회 유초중고 성인 성가대를 지도하는 사역과 함께 산업교육부 지도목사 월간 충현지 주필 등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지금도 충현교회에서 6년동안 사역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사건 몇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고인이 되신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과 또 하나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박 모씨를 이단으로 규정을 한 사건이다. 필자는 박씨를 이단으로 규정을 했다가 온갖 핍박과 협박을 받았고 필자를 죽인다고 서초동 사택 앞에 깡패들을 동원하여 필자가 얼마동안 집에서 출입을 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이로 인하여 부목사로서는 처음으로 자동차를 가지고 사역을 해야하는 행운도 있었다고 해야 하나? 당시는 대형교회 몇 분만 자동차가 있던 시절이다. 그래서 필자는 부목사 신분으로 차를 가지고 다닐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이 사건은 흥미 있는 일들이 많아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누고자 한다.)

또 한 가지는 강남에 새로 지어진 성전 본당에 설치된 올갠을 필자가 주선을 하여 설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음악목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당시 이 일을 위하여 1982년 10월에 예배위원장(김기정 장로) 건축 담당자(오진국 장로) 음악목사인 김하진 목사가 미국에 있는 알렌(Allen) 회사로 현장 방문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자를 10월에 미국이 아닌 새로운 목회지인 동원교회 담임목사로 보내신 것이다.

3. 담임목사 사역

이렇게 하여 필자는 1982년 10월 2일 첫 주일부터 서울 광진구에 있는 동원교회 담임목사로서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담임목사가 된 것도 신비스럽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이다. 필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필자가 원해서 하게 된 사역은 없다. 누군가 알 수 없는 손길이 필자를 인도하셔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녔을 뿐이다. 동원교회 담임목사가 된 것도 그렇다. 한 번도 그 교회에 가 본 일도 없고 가고자 생각한 교회도 아니다. 동원교회가 어디 있는지 어떤 형편에 있는 교회인지도 모르고 가게 된 것이다. 동원교회에 부임하고 나서야 하나씩 하나씩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가 동원교회 담임목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하심과 인도하심이었다. 필자가 충현교회 부목사로 봉사하고 있을 당시 교회에서는 부교역자들에게 일년에 여름 7, 8월 중 한 달간 휴가를 주었다. 그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8월에 목회자를 위해 두 주간 재교육하는 교육과정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8월에 휴가를 얻어 두 주간동안 재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되었다.

첫 주간이었다. 오전 교육이 끝나고 점심 시간이다. 어떤 분이 필자를 찾는다. 그분이 필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분이 하는 말이다. 필자는 자기를 잘 모르겠지만 자신은 필자를 잘 안다고 한다. 그래서 물었다. 필자를 어떻게 잘 아느냐? 고 말이다.

그분이 하는 말이 필자가 월간 충현지에 글을 쓰시는데 그것을 잘 읽고 있으며 자신의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글을 통하여 필자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소속된 노회에 목사님을 찾고 있는 교회가 있는데 필자를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곧 교회에서 목사님을 찾아갈 것이라고 한다. 너무 일방적인 통고인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이 이런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닐까?

필자는 정중히 사양을 했다. 필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담임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금 충현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들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교회가 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가 정중히 사양을 했으나 그분은 한 주간 동안 기도해 보라고 하면서 다음 주에 다시 찾아 뵙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신다.

필자는 관심이 없는 일이기에 이전과 같이 한 주간을 보내고 다음 주가 되어 연세대학교로 갔다. 그런데 그분이 다시 나를 찾았다. 그분이 바로 당시 성실교회 담임목사이며 황동노회 서기직을 맡아 수고하시던 고 우희영 목사이시다. 후에 알고 보니 목회를 잘 하시는 유능한 목사임을 알 수 있었다. 우희영 목사가 필자를 만나 하는 말이 교회에서는 공동의회를 하였고 필자를 담임목사로 모시기를 결정을 했으니 곧 교회 대표들이 찾아갈 것이라는 말을 전하고 필자의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가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우희영목사 말대로 다음 주일날 충현교회를 동원교회 대표들이 찾아와 교인들이 싸인한 것을 보여 주면서 지금 당장 교회로 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 이 교회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고 그 교회의 초청을 받은 일도 허락을 한 일도 없으니 그냥 돌아가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다른 분 좋은 분을 모시도록 하라는 말을 전했다.

동원교회 대표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곧 다시 찾아뵙겠다고 말하며 기도해 보시라는 것이다. 두 주 후에 다시 찾아와 10월 첫주일 2일부터 와서 설교를 해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필자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동원교회 담임목사가 된 것이다. 당시 동원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교회 대표들이 충현교회로 찾아와서 목사님이 오시면 목회만 하시면 된다는 말을 하였는데 목회를 할 만한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몇 가지 큰 문제가 있는 교회라는 것이다.

첫째는 상처가 많은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를 새로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목사님과 다른 두 분 집사님이 추락하여 3분이 사망한 교회이다. 4분이 떨어졌는데 한 분은 살았으나 병원에서 1년여 동안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이로 인하여 첫 예배를 드릴 때부터 교인들이 울음바다가 되는 것을 보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목사의 설교에 은혜가 되어 우는 것이 아니라 유가족들이 슬퍼서 울기를 시작하니 교인들도 유가족들이 불쌍하고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주일날이 되면 예수 부활하신 축제의 예배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 찬 예배가 아니라 장례식과 같은 예배를 드려야만 했고 새로 찾아온 사람들은 교인들이 울고 있는 장면을 보고 다시는 오지 않는 분위기였다. 필자가 부임한 그 당시에는 전도가 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교회가 동원교회였던 것이다. 이처럼 상처뿐인 교회에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목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큰 문제는 신앙적으로 회의에 가득차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다. 성도들은 필자에게 어찌하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는 목사님을 떨어져 죽게 하느냐? 는 것이다. 천사라도 보내서 보호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에 대한 불신 사상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들을 신앙적으로 다시 회복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목회자로서 가장 어렵고 힘든 문제였던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재정 문제이다.
빚으로 교회 운영이 안 될 정도였다. 심지어는 세 가정의 장례식 조의금까지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교회가 다 써 버린 상태이다. 건축 마무리 단계에서 사고가 났으니 건축 빚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건축 마무리 작업도 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필자가 서초동 충현교회 사택에서 이사를 할 때 집을 얻을 돈이 없어서 장로 개인이 임시로 자양동에 있는 지하실 방을 사택으로 얻어 주어 이사도 하는 실정이었다. 교회는 구의동에 있는데 사택은 자양동에 있으니 만약 필자가 충현교회에서 사용하던 자동차를 가지고 가지 않았으면 새벽기도부터 한 시간씩 걸어 교회에 다녀야 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연약한 필자를 위하여 미리 준비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선교 사역(신학교 및 목회자 재 교육)

목회자가 선교사로서 결단하기 까지의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필자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후 목회를 어렵고 힘들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순탄하게 목회자로서의 길을 걸어 왔는데 말이다.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담임목사로서는 하나님이 필자를 마치 용광로에라도 집어 넣은 것 같은 환경에서 목회를 시작해야만 했다.

우선 가장 어려운 문제인 교인들의 불신과 슬픔속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나 역량이 필자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자세로 목회를 하게 되었다. 그저 필자는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심부름을 한다는 자세로 말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을 하였고 설교나 교육을 통하여는 불신과 슬픔에서 벗어나도록 예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교인들이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정신없이 10여년이 지난 후 교회는 안정이 되었고 2부로 나누어 예배를 드릴만큼 성장을 하게 되었다. 건축 과정에서 남아있는 마무리 작업도 하고 건축하며 진 빚들도 청산을 하게 되었으며 3분의 유가족들을 위하여는 편안하게 거처할 수 있는 거처도 가정마다 마련해 드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교육과 선교에 중섬적으로 투자하며 교회 교육에 힘을 쏟게 되었고 해외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을 도우며 선교사를 단독으로 파송하게 되었다. 뿐 만 아니라 동원교회는 유능한 현지인들을 교회가 직접 초청하여 한국어를 공부하게 하고 총신대학원에 보내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고 총회에서 시행하는 강도사 고시 목사 고시 등을 거쳐 교회가 소속된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하였고 총회 산하 GMS선교사로 본국으로 재 파송하도록 하므로 선교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고 그동안 교회는 4분의 현지인들을 선교사로 재 파송하였고 그들은 자신의 모국에서 선교사로 많은 사역들을 통하여 열매를 맺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필자는 동원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1988년도부터 여러 선교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필자에게 선교 현장에 목회 경험이 있는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마음을 갖도록 하신다. 그래서 필자는 20년 목회를 하고 조기 은퇴를 하고 선교 현장으로 가야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2001년 11월 25일 동원교회에서 GMS동남아시아 명예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3일 후인 28일 첫 선교지인 중국 광저우(廣州)로 떠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자신의 선교사 파송을 위하여 GMS에 목회 20년 이상 하신 분들이 조기 은퇴 후 선교지로 가기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명예선교사 제도를 만들어 파송하자고 건의를 하게 되었고 이를 이사회와 총회에서 받아 들여 이 제도가 생기게 되었고 명예선교사 제도가 생긴 후 처음으로 필자가 명예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된 것이다.

1. 첫 선교지 중국 광저우(廣州)

필자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을 때에 선교지가 어떤 한 나라가 아니라 동남아시아 지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 이유는 필자는 목회를 하면서 인도에 신학교를 세워 운영을 하고 있었고 태국에서는 현지인 목회자들을 훈련하고 교육하는 사역과 몇 개의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일 그리고 방글라데시필리핀 등에서 강의를 하며 인재 발굴과 교육하는 일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태국에 머물면서 이들 나라들을 다니며 사역을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태국 CCT총무인 킴하찬드라 목사를 만나 비자를 주기로 약속도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태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홍콩에서 선교 모임이 있어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중국으로 선교지를 바꾸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셨다. 그래서 첫 선교지가 중국 광저우(廣州)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것 하나 필자가 생각한대로 된 것은 없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필요한 곳에 보내셔서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필자가 2001년 11월 28일 중국 땅에 첫 발을 들여 놓게 된다. 1991년 중국과 국교를 맺기 전에 한번 다녀온 일은 있으나 말 한마디도 알지도 못했고 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간 것이다. 중국 말은 ‘你 好’(‘니 하오’=안녕하세요?)라는 말도 못했다.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탄과 년 말 년 초가 지난 후 2002년 3월부터 광주에 있는 琦南大學校(지난따수웨)에서 중국 언어를 연수받게 된다. 중국 말은 성조가 4개가 있어서 발음 공부만 한 달 이상을 시킨다. 이 대학교에는 전 세계에서 중국어를 배우기 위하여 젊은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는 학교이다. 북한 학생들도 여러 명이 와 있어 가끔 만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2003년 초에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Saas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바로 광주에서 발생한 것이다. 학교가 폐쇠가 되었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식초를 사지 못하여 난리가 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식초가 병균을 죽인다는 소문 때문에 식초가 동이 나고 어디에서도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유학생들은 물론 외국인들이 다 철수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선교지에 남이 있으려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자녀들은 물론 교인들이 난리이다. 빨리 귀국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4월 25일 첫 선교지인 광주에서 철수를 하게 된다.

2 두 번째 선교지 괌(Guam, Saipan)

두 번째 선교지가 남태평양에 있는 한 섬 Guam이다. 필자가 중국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이며 동창인 조 환목사(태평양 장로교회 담임목사)가 연락을 하여 괌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괌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데 그들을 상대로 선교를 하라고 하면서 초청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 철수한 지 20일 만인 2003년 5월15일 괌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필자가 괌에서 주로 하는 사역은 태평양 장로교회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조 환 담임목사를 돕는 사역과 괌에서 비행기로 30분 거리에 Saipan이라는 섬이 있는데 그곳에 세워진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사역이었다. 그 당시 사이판에는 고 이만열선교사가 세운 신학교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주로 중국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주중에는 괌대학에 다니면서 필요한 공부도 하게 되면서 재충전의 시간도 가질 수 있는 기회였음을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괌은 기후가 좋아서 일 년 내내 평균 기온이 28도이다. 22도 이하로 내려가지도 않고 32도 이상 올라가지도 않는다. 항상 따뜻하고 공해가 없다. 그래서 새벽기도가 끝난 후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해변가로 가 준비한 아침 식사인 빵과 커피를 마시고 따뜻한 온천수와 같은 바닷물에 들어가 아름답고 다양한 물고기들과 헤엄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였음은 하나님의 위로의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러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이다.

2004년 봄부터 중국에서 전화가 온다. 중국으로 들어와 자신들을 좀 도와 달라는 것이다. 필자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전화를 한 것이다. 지금 중국에 한인들이 몇 가정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도와 달라는 내용이다. 그래서 필자는 거절했다. 우선 필자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 뿐 아니라 지역이 중국 중부 지역에 있는 合肥(안휘성 수도)라는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라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다.

北京이나 上海 혹은 첫 선교지였던 廣州라면 몰라도 듣도 보지도 못한 지역에서 오라고 하니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전화를 하여 중국으로 다시 들어오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화를 받으면서 이제는 괌에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괌이 조그마한 섬이다 보니 때로는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자동차로 2시간이면 섬을 일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괌 섬 일주하기를 여러 번 한 바가 있다.

필자는 그분들의 요청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생각이 들어 2004년 8월 현지 답사를 하게 되었고 중국 중부에 속해 있어서 필자가 하고자 했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기에는 적당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중국에는 선교사들이 은밀하게 운영하는 신학교들이 중국 각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가르칠 교수가 부족한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에 부응하기 위하여 중국 중부에 있는 安徽省 省都인 合肥로 선교지를 옮기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필자는 2004년 11월 2일 괌에서 철수를 하게 되었고 약 한달 후 12월 1일 세 번째 선교지인 合肥로 떠나게 된다. 合肥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던 黃山이 있는 安徽省의 성도이다.

3 세 번째 선교지 중국 합비(合肥)

필자의 세 번째 선교지는 합비(合肥)이다. 합비라는 도시는 安徽省의 성도이고 上海에서 서쪽으로 가면 南京이 나오고 南京에서 서쪽으로 더 가면 合肥라는 도시가 있다.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황산(黃山)이 바로 安徽省에 있고 합비에서 2-3시간 가면 되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산이다. 필자는 여기서 8년여 동안 중국 선교와 동남아시아 선교를 위하여 사역을 하게 된 지역이다.

필자는 괌에서 철수한지 한달도 안되는 2004년 12월 1일 중국 合肥로 이주를 하게 되고 그곳에서 2-30여명이 모이는 한인교회와 한국문화원 사역을 한 지역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개척교회를 한 경험이 없었는데 중국 合肥에서 그 경험을 하게 되었고 외국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재미도 있었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목회 경험을 하게 되었던 시간이다. 일주일에 주일날 하루만 모여 예배를 드리는 형편이었으나 서로 도우며 사랑하는 성도의 교제를 맛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의 성도들을 한국에 있으면서도 자주 교제의 시간을 갖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의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도 마음대로 부를 수 없었지만 은혜가 충만한 예배의 시간이었음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시기에 예수를 영접하고 지금까지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성도들이 여러명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필자는 주일날 예배가 끝나면 주중에 흩어져 있는 신학교를 찾아가 강의를 하는 사역을 했다. 이런 관계로 월요일이 아니면 주일 예배가 끝난 후 바로 강의 요청이 있는 신학교를 찾아 떠나야 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어진다. 지금 같으면 단 하루도 감당하기 어려울 턴데 말이다. 어떤 때는 2층 3층 침대 버스를 타고 저녁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 일찍 해당 지역에 도착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일어날 수도 없는 그런 버스이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금요일이나 토요일 출발하여 사역지인 合肥에 토요일 저녁이나 주일날 아침에 도착하여 바로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필자는 合肥에서의 사역도 2012년 9월로 마감을 하고 중국에서 철수를 하게 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인교회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문화 사역도 할 수 없게 된 것이 원인이다. 선교 사역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2008년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경제 불황 때문이다. 환률이 두배 이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래서 주재원들이나 사업을 하러 왔던 분들 특히 유학생들이 거의 대부분 철수를 하게 되었다. 한인교회 교인들이 다 떠나게 된 것이다. 이분들 중에 몇 분이 문화 사역도 도와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자원이 하루 아침에 다 떠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주일날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고 문화 사역도 어렵게 되므로 결국 2012년 9월 중국 合肥에서 완전히 철수를 하게 된 것이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필자는 合肥에 계속 머물면서 회복되기를 기다렸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좋지 않았고 필자의 건강도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결국 철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꼭 중국에 있으면서 하고 싶었던 문화 선교 사역은 출발은 잘 했으나 끝내 열매를 얻지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음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자가 하고자 했던 일들을 막으셨다는 것을 지금 와서 깨닫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리라. 필자가 문화 사역을 하려고 했던 것은 간접적인 선교와 상류층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치 않았던 사역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투자한 만큼 꽃을 피우지 못한 것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한다. 이 사역으로 재정적인 손해를 많이 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필자가 중국에 있으면서도 동남아시아지역에 있는 태국 인도 방글라데시 필리핀 캄보디아 미얀마 일본 등에서 교수 사역으로 여러 선교사들을 돕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

봉사사역(東洋 醫術)

하나님께서는 본래 필자가 원했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동양의료 봉사를 통해 선교를 마무리하도록 하신 것으로 믿는다. 그동안 사역해 오던 신학교 교수로서의 사역보다는 동양 의술로 봉사하도록 하면서 영혼들을 구원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이 사역을 하게 된 동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2012년 9월 중국에서 철수를 한 이후에도 그동안 사역하던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는 신학교와 한인교회들을 돕는 사역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중국에서 철수한 이후 건강이 빠르게 쇠약해 지고 있다는 것을 필자 자신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기도 하고 약을 복용해 보기도 하였으나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우연한 기회에 필자를 동양의학에 입문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래서 2013년 7월 24일 청량리에 있는 정통침뜸교육원(원장 灸堂 金南洙)에 등록을 하고 동양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동양의학은 본래 우리 조상들이 오랬동안 집약하여 발전시킨 의술로서 약초를 이용한 한약 외에 침뜸을 들 수 있다. 이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기초과정 중급과정 고급과정으로 나누어 공부를 하는데 각과정이 3개월씩이다. 이 과정을 공부하면서 필자 자신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灸堂 先生이 평생 진료를 통하여 터득한 8자리에 침이나 뜸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560여개의 혈 자리가 있는데 그중에 8자리에 뜸을 하면 무병장수한다는 혈 자리이다. 우리 몸 전체를 아우르는 자리로서 상하 좌우 전후에 있는 자리이다. 남자는 상단전의 中脘 하단전에 있는 氣海와 關元 등배부에 있는 肺兪와 膏肓 머리에 있는 百會 좌우 팔 다리에 있는 曲池와 足三里이다. 여자는 하단전의 氣海와 關元을 대신하여 中極과 水道(2자리)라는 자리이다. 그래서 여자는 9자리이다. 여기에 뜸을 하면 몸에 문제가 있는 질병들이 치료가 되고 무병장수한다는 신비의 혈 자리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9월 16일부터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 바로 필자 자신이 혈 자리를 찾아 뜸을 하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 일 개월이 지난 후부터인가? 필자 자신이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도 그러지 않고 열심히 뜸을 뜨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필자의 경우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졸업한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뜸을 뜨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할 수 없는 혈 자리가 몇 군데 있다. 등 부위와 배 부위 그리고 머리에 있는 百會라는 혈 자리이다. 본인이 직접 하기에는 쉽지가 않은 혈 자리는 집사람의 도움을 받아 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집사람도 필자가 좋아지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필자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고 있다.

이러한 치료 방법으로 필자는 몸에 이상이 있었던 문제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전의 건강을 되찾게 된 것이다. 사실 필자가 중국에 10여 년 이상 거주하면서 의술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 하지 못했었다. 주일날은 예배를 인도해야 했고 평일은 학교에 다니며 언어 공부를 하고 방학때면 여기 저기 다니며 신학교에서 강의를 해야 하는 일들로 시간을 얻을 수가 없었다. 관심은 있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할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건강 문제로 치료를 받게 되면서 시간도 있었고 기회가 주어져 이같은 신비스러운 의술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평소 동양의술은 중국이 앞서 있는 것으로 생각을 했으나 그렇지 않고 한국이 앞서 있는 의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중국에서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믿어진다.

필자는 이를 통하여 이 의술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문제가 발생하면 인간 스스로가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몸에 이미 주셨는데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동양의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의료의 일부분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문제가 있는 부분을 찾아 그 문제가 해결되도록 하는 동기 부여를 하는 의술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우리 몸에 있는 5장 6부가 원활하게 움직이고 제 역할을 할 때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가 있다. 그중에 어느 한 장기라도 문제가 생기면 다른 장기에도 영향을 주게 되고 결국 우리는 병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침뜸과 같은 동양의술인 것이다. 여기서 동양의학적인 용어나 방법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독자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동양의술이란 상당히 철학적이면서도 우주적인 원리에서 해석되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서 여기서는 그것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일년 남짓 뜸을 한 결과 필자의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감기도 걸리지 않으며 지금까지 지내고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필자는 본래 일 년에 몇 번씩 감기몸살로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 의술로 치료를 하면서부터 그 증상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2004년 9월 20일 졸업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와같은 새로운 달란트를 필자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는 것일까? 기도하며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필자의 마음속에 병약한 사람들을 가서 도우라는 것이다. 특히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도우라는 마음을 주신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계속 기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 2014년 11월 28일 태국 방콕으로 떠난다. 계획도 준비도 없이 무작정 떠난 것이다. 치료할 장소가 준비 된 것도 아니고 치료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와서 도와 달라는 요청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말이다.

태국 방콕은 필자가 목회하면서 1988년도부터 해마다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일과 목회자 재 교육을 위하여 다녔기에 낫설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치료를 위하여는 일정한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준비된 장소가 없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선교를 위하여 방콕에 와 계시는 장로님이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어 만나 부탁을 드렸는데 한 주간 정도 장소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하여 12월 4일부터 그곳에서 선교사님들을 치료하게 되었고 다음 해인 2015년 1월부터는 노인회관에서 장소를 제공해 주어 그곳에서 치료를 하게 되었다. 인도 러시아를 비롯하여 태국 주변에 있는 여러나라에서 선교하고 있는 분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한인들도 여러분을 치료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부족한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지금까지 필자가 사역한 나라는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미얀마 인도 방글라데시 가나 호주 등 다양한 나라에서 봉사를 하였지만 주로 태국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다. 태국은 2014년부터 2023년까지 10여년 동안 다니며 많은 환자들을 만났고 치료를 하였다. 아마 그 수자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수 천명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사례를 여기에 남긴다.

사례 1: 다리 마비 환자가 치료가 된 사례이다.
이분은 여성으로 나이는 40대 전후의 환자이다. 태국 남쪽 방콕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가면 Hua Hin이라는 휴양도시가 있다. 왕의 별장이 있는 도시이다.

필자가 그곳에 있는 Cornerstone Church(Rev. Ratsami)에서 봉사할 때이다. 성도들은 물론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한 남자(여성의 남편)가 금연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금연할 수 있도록 치료해 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독실한 불교 신자라고 한다. 그래서 금연에 도움이 되는 치료를 해 주었다. 그런데 이 분이 자신의 아내가 휠췌워를 타고 왔었는데 자신이 치료를 받고는 아내의 휠췌워를 밀고 집으로 가려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아내도 치료를 받기 위해서 온 것으로 알았는데 그냥 가려고 하는 것을 보고 들어오라고 불렀다. 의료인으로서의 본능이 나타났다고나 할까? 그래서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왜 부인이 아직 젊었는데 휠체워를 타고 있나? 그랬더니 얼마 전 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가 마비가 되어 전혀 감각이 없어 움직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찰을 해 보니까 왼쪽 다리 전체가 전혀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필자는 의료인으로 호기심이 발동을 했는지 성령의 역사인지 확인은 할 수 없으나 용감하게 침대에 눞이고 치료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발 다닥에 자극이 되는 치료용 물건을 붙여 주고 남편으로 하여금 부축하여 걷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오라고 하고 보냈다. 그때가 2000년 초 코로나가 막 발생하여 퍼져 나가고 있을 때이다. 그 부부가 다음날 오전에 다시 교회로 찾아왔다. 그래서 물었다. 그랬더니 발에 약간의 감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날 오전이 그곳에서의 치료 마지막 날이다. 그래서 앞으로 두 주 후에 다시 내가 올 터이니 필자가 말한대로 매일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치료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분 때문에 필자가 다시 온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날 오후 방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콕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코로나가 한국에서 발생이 되었다고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 주지를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태국에 더 이상 머물수가 없어 필자는 그분들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급하게 귀국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필자는 늘 마음에 빚을 진 기분이었을 뿐 아니라 그 분들이 궁금하여 2022년 6월 9일 TG657편으로 태국 방콕으로 떠나게 되었고 방콕에서의 봉사 활동이 끝난 후 6월 29일 Hua Hin으로 내려간다. 다음날부터 봉사 활동이 시작되었고 7월 3일 주일날 다리가 마비되었던 부부가 걸어 들어오며 필자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자기 가족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아들까지 교회에 다 나오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 이후 담배를 끊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부족한 종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할렐루야!

사례 2: 손가락 통증과 허리 통증이 사라지게 되는 사례이다.
손가락 통증으로 고통을 당하신 분은 현지 목사님 사모님이시다. 태국 방콕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5시간 정도 가면 폐차분이라는 지역이 있다. 이 지역은 통합측 선교사인 김도연선교사가 사역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 김도연 선교사와 의료봉사를 위하여 찾아갔다. 아침 일찍 방콕에서 출발했으나 현지에 갔을 때는 저녁때가 되었고 몇 지역을 거쳐 농촌지역에 있는 현지인 교회들로 안내를 한다. 목사님을 치료하기 위하여 한 교회를 찾아갔다. 밤 10시쯤 된 시간이었다. 목사님을 치료한 후 사모님이 손가락이 너무나 아파 잘라내고 싶은 심정이라고 호소하면서도 치료는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손을 좀 보자고 했는데도 거절을 한다. 무섭다는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선교사님이 전혀 아프지 않고 멀리서 이렇게 밤 늦게 찾아 왔으니 한번 치료를 받아 보라고 간청을 하니 겨우 손을 내 일었다. 필자는 사모님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치료를 해 주었다. 아니 침만 꽂아 놓고 시간이 늦었으니 30분 후에 남편인 목사님이 제거해 주라고 부탁하고 우리는 숙소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필자는 그 후로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목사님이 연락을 주셨는데 자신은 물론 아내의 손가락 통증이 다 사라졌다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그리고 허리 통증 환자는 많은 분들을 치료했지만 여기에 소개하고 싶은 분은 40대 전후 한국 교민이다. 태국에서 사업을 하시는 분인데 갑자기 허리가 아파 허리를 펴지 못한다고 하면서 찾아왔다. 당시는 방콕 수쿰빗에 있는 노인회관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이다. 치료를 하고 하루 지나 한 번 더 오라고 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한 번 치료를 받고 다 나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공장을 하고 있는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방콕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가져왔다는 토종꿀을 한 병 가지고 와서 선물로 받은 일이 있다. 그 외에도 허리가 아픈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례 3: 중풍 환자가 한번 치료로 손가락이 펴지고 팔이 올라가게 된 사례이다.
이 환자는 태국 방콕에서 비행기로 1시간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콘시타마랏(Nakonsitamarat)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서 만났던 분이다. 이 지역은 필자가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파송한 권오혁선교사가 사역하는 지역이다.

2016년 3월 1일부터 4일까지 필자를 비롯하여 필자와 같이 침뜸의술을 공부하고 졸업한 정유상선생과 최학규선생 두 분과 같이 사역할 때이다. 이 분들을 예수를 잘 믿는 교회의 집사들이기도 하다. 둘째 날인가 생각된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왼쪽 팔을 완전히 사용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찾아왔다. 손가락도 펴지지를 않았다. 이 청년을 치료한 것이다. 치료가 끝난 후 손가락을 펴 보니까 손가락이 펴지고 팔이 어깨 위로 올라가지 않았는데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이 청년도 놀라고 필자도 놀랐다. 한번 치료로 이러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다니? 하는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외 외국인들과 스님들도 와서 치료를 받았다.
우리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는데 그 사랑의 능력으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는 역사가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는 경험을 하면서 예수의 사랑이 담긴 봉사가 얼마나 큰 힘이 나타나는가를 가는 곳마다 체험하며 봉사하게 되니 늘 감사한 마음뿐이다. 이로 인하여 여기저기서 봉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파’(Rapha)라는 히브리 말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출15:26) 이 말은 구약 성경에 60회 이상 쓰여져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인적으로 치료하시는 분이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의지함으로 영혼과 육신이 치료받고 새로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사역을 동시에 하셨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마8:2-3 20:29-34 막7:31-37 요5:1-9 등)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병든 자들을 치료하시는 의사로서 오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마9:12 막2:17 눅5:31)

필자는 이 사역이 바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역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기쁨으로 봉사하고 있다. 필자의 마음 같아서는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주변 환경과 건강이 어떠할지? 솔직한 고백이다. 가족들은 이제 그만 하라고 계속 만류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럴 때 ‘마음은 원이로되’라는 말이 적당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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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진 명예선교사 -

황동노회 노회장 태국 BTS신학교 교수 태국 Global Theological Seminary 교수 India Reformed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학장 C국 여러 지역신학교 교수 일본 필리핀 미얀마 사이판 신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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