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0차 런던 대회를 참석하게 되면서 이슬람의 긍휼사역에 대해서 발표해 달라고 했을 때, 요즘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나라들이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인지 하게 된다. 지난 20여년이 넘도록 중동의 중요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걸프 전쟁(1991년 1월), 9.11사건 (2001), 이락크 전쟁(2003), 쟈스민 혁명(2011년1월25일) 등 여러 번에 걸쳐서 무슬림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는 쟈스민 혁명이 투니시아에서 시작하더니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예멘 등으로 잇다라 일어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혼란은 날로 갈수록 더욱 힘들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2년 전 2014년은 이락크에서 시작된 순니파의 이슬람 국가(IS) 가 일어나 더욱 중동에는 긴장과 고통과 아픔이 있게 되며, 이락크와 시리아에서 난민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긍휼사역에 대한 절실한 요청이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새 계명(The Great Commandment) 을 주셨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며 둘째는 그와 같으니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cm_simple_footnote id=”1″](마태22:37-40)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주신 대 위임 명령 (The Great Commission) 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 28:19-20)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계명과 대위임 명령을 행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협력하여 이 사역을 감당하기 원하신다. 즉 대 협력(The Great Cooperation) 이다. “내가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 17:22) [cm_simple_footnote id=”2″]
위의 세 대 명령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받은 자들마다 순종 하여야 한다. 또한 무슬림들 대상으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슬람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떻게 무슬림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생각하여야 한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웃사랑을 통해 무슬림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중동지역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가운데 이들에게 긍휼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난한 나라는 거의 무슬림 나라들이다. 이러한 나라들은 국내 긴장과 내전이 많이 일어나고 있고, 이로 인해 나라를 떠나 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라와 무슬림들에게 긍휼사역이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는 긍휼사역을 어떻게 정의하고 근거로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중동의 난민사역의 기초와 철학을 통해, 무슬림 사역의 실제들을 살펴보려고 하며, 유럽의 한국교회들이 어떻게 긍휼사역에 도움과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긍휼사역의 정의와 근거
1) 기독교: 긍휼 사역의 성경적 근거를 살펴볼 때, 긍휼이란 히브리어 어원 레헴인데 , 이 말은 태, 자궁이란 뜻으로 사랑을 뜻한다. 레헴은 어머니의 사랑, 무조건적 사랑, 돌보는 사랑을 의미한다. 즉 긍휼사역은 하나님의 따스한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의 ; 마음, 어머니의 영,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역으로서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나서 필요를 채워주고 돌보고, 감싸주고 , 파괴된 생명을 회복시키는 사역이다. 마태복음 25장31-46절을 보면 긍휼을 베푸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이 여김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는 성도간의 필요를 채우고, 선행과 구제하는 일 이였고, 목적이 구제하는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하는 것 이였다.(사도행전 6:1-6) 또한 에베소서 4장 1절에 보면 교회의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에서 작은 자들의 필요를 채우는 구제와 봉사를 중요시 여기신다. 또한 성경은 긍휼을 베푸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 했다. [cm_simple_footnote id=”3″]
예수님께 진정한 경건은 사랑 이였다.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경건이고 (마22:34)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더 좋은 참된 경건이다. [cm_simple_footnote id=”4″]
2) 무슬림: 무슬림 사회에서는 긍휼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쟈카트 (Zakat)는 축복(Blessing), purification, increase and goodness. 로 정의한다. 자기의 것을 떼어 가난한자들과 나누는것, Fitrana(Sadaqat-ul Fitr) 이것은 무슬림들의 의무로서 돈이나, 귀속품곡식 1.75킬로그램에 상당하는 돈 등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을 말한다. Fidya 는 나이든 사람,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Sadaqua 는 자선을 말한다. 가지고 있는 것에서 좋은 일에 사용하는 것을 사다카라 한다. 이렇게 무슬림 사회에서 긍휼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가난한자, 병든자, 약한자, 고아와 과부 나이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들, 또는 있는자들이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당연하고 의무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이들은 여러 자선 단체들이 있다. “Muslim Hand”, Islam Relief, Islamic American Foundation, International Islamic Charitable Organization. Misr Kheir (Egypt Human right), 등이다. 이에 비해 이집트 기독교인들의 자선 단체는 몇 개가 없다는 것이다. Christian mercy ministry Organization: Presbyterian, Orthodox, and Episcopal 등인데 CEOSS: Coptic Evangelical Organization for Social Services), CSD: Counsel of Service and Development, Think and Do Ministry 등이 있다.
중동의 이슈인 난민사역의 기초와 철학(루펜다스 교수의 강연에서 발췌한 내용)
나는 지난 2015년 12월9일-12일 암만에서 열렸던 “난민사역 써미트” 에 참석하였다. 중동지역의 긍휼사역으로 큰 이슈인 난민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중요한 점들이 무엇인지 또한 미래에 중동에 사역은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배우기 위해 참석하였다. 난민사역 써미트의 주 강사로 강의하셨던 분이 루펜다스 교수였다. 이분은 캐내디언 침례교 소속으로 현재 유럽 침례교 연합에서 사역하고 있다. 토론토 틴데일 신학교의 사회정의, 긍휼, 개발 연구 교수이다. 이분의 강의에서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난민 사태는 사실 이 시대에만 나타나는 그런 새로운 현실은 아니다. 계속 이런 일들은 있어왔으며, 최근에 일어난 웨이브일 뿐이며, 갈등, 박해, 무너짐, 죽음으로 인한 결과이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한 피난은 역사 속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난민의 웨이브로 인한 인간의 고통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난민들에 대한 하여금 관점을 이해할 수 있기를 촉구한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교회가 그 난민들의 현실과 그리스도의 긍휼을 이해하고 나타내는 가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프린스턴 신학자 다니엘 미글레오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특정한 역사와 문화적 상황에서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분이시다 라고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기까지 주 예수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어떤 삶의 상황 속에 거하여 있는지에 기반하여 형성된다”라고 하였다. 다음에서 성서적 신학적 기반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성서적, 신학적: Biblical and Theological Foundation
우리가 살고 있는 난민의 이동은 정치적 문제만은 아니다 이 세상의 타락이라는 신학적이고 성서적인 프레임워크가 반드시 필요하다. 죄란 단순히 개인적 상황을 넘어서서, 사회적 기관과 가치를 통해서도 동시에 들어나게 된다. 미국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나 발터 빙크는 말하기를 “악은 흔히 개인의 문제로 여겨질 때가 종종 있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와 기관은 그것보다 더 악한 것에 대한 결과물이고, 또 변화를 향한 저항물로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우리사회의 사회, 법적, 경제적 구조는 불의하고 악한 것들이 많다. 어떤 특정 사람이나, 그룹, 개인을 차별하는 형태로 나타나곤 하는데 인종차별, 공산주의, 성적착취, 정치적 압박, 인신매매, 강제이주, 인종 말살 등 이런한 것들이 우리의 현실의 일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민과 이주자 사태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고, 어떻게 그들은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이 시작된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땅으로부터 쫓겨 났었다. 가인 역시 그의 질투와 살인으로 인해 자기 집으로부터 쫓겨났다. 이런 모든 사태가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것일 찌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성품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예배하도록 허락하셨고 (창4:3-4), 보호하셨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복 시키시리라 약속도 하셨다. (렘29:10-14) 또한 포로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지를 가르치셨고, 복을 베푸시었다.(렘29:4-8) 하나님의 성품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의로우심을 통해 나타나며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난민과 이주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시작점이 된다. 마태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에서 보면 예수님이 심판자 그리스도에 관해 말씀하시는 35절에보면 특별히 이방인을 선대했던 것을 신실하다고 묘사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이방인이란 비 유대인 외국인을 가리키고, 가난하고, 그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르킨다. 예수님은 갈급하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향한 긍휼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유대인 가난한 자들이나, 과부, 고아들에 대한 그분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가난한자들, 이주자들, 난민, 장애인 등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거지 나사로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장 잘 드러남을 볼 수 있다.
2) 선교적: Missiological Foundation
난민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역해야 할지에 관한 선교학적 패러다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로아시아 출신 신학자로서 예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미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배제와 포옹” 이라는 개념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 볼프(Volf)는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짓는 죄의 많은 부분은 ‘배제의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한 사회는 순결에 대한 거짓된 이해를 갖고 있으며, 우리 세상은 그러한 사람들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을 ‘불 순결 하다’ 라고 규정하는 그 악마적 마음이 씻겨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이 이 사회로부터 씻겨져야 한다고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순결한 사람을 불 순결 하다고 규정하고, 그들을 돕는 것을 거부하는 악마적 마음 말입니다.
난민과 이주자들이 사회로부터 어떻게 부당대우를 당하고 있으며, 배재 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에서 사역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볼프(Volf)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적대적 인간을 그분의 신적 공동체-합일 가운데로 받아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대한 모델이 된다고 했다. 그는 설명하기를 배제에서 포용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회개와 용서를 시행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이 제공되어야 하고, 서로의 마음속에서 타자를 향한 공간을 만들어야 하며, 기억을 치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중립을 지키는 것”은 합당한 처사가 아니며, 고통 받는 자들 곁에 서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예언자적이고 사도적인 전토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고난의 소리를 듣고, 그들 곁에 서서, 행동하는 자들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며 싸우는 자들이다” 라고 말한다.
볼프가 말한 것처럼, 무슬림 난민들을 향한 사회적 배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아랍 역사와 문화 속에도 역시 그러한 개념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랍은 부족 문화 개념이다. 그 개념의 이유는 ‘아싸비야” 때문이라고 이반 칼더는 말하는데 이것을 “그룹 연대성” 혹은 그룹 자각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아쌰비야”는 공동체, 가족, 부족, 종교 그리고 나라를 하나로 묶어주는 개념이다. 소속감을 주고 한 공동체 기관 내에서의 안정감을 주는 요소이다. 모든 사회적 변혁의 동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룹 응집력을 잃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그 공동체의 파멸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룹 응집력에 집중하는 것이 그 그룹의 생존을 담보하고, 동시에 그것은 타자를 배제하게 되는 과정을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무슬림 난민 사역에 대한 기초를 제공한다. 그들의 이주 상황 속에서 그들을 지지해주고, 사회, 종교, 문화, 민족적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공동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힘든 부분이다. 가장 큰 것은 그 뿌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그러한 물리적, 사회적, 문화적 근본을 떠나서는 “의미”를 찿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선교학적 교훈은 시리아와 이라크로부터 일어나는 현재의 난민 참사와 교회의 반응은, 교회사에서 무슬림 선교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데이빗 게리슨(David Garrison)의 “Wind in the House of Islam” 책에서는 무슬림 공동체를 향한 교회사역의 다양한 방법들을 묘사한다. 한 개의 전략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입각하여 다양한 방법들이 있어왔다. 기록된 가장 최초의 회심운동은 972년인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후 975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여러 부족들이, 무슬림 지도자들이 부여했던 재정적 부담을 피해서, 기독교로 회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부터 무슬림 선교는 다음과 같은 방법들로 표현되어 왔다.[cm_simple_footnote id=”5″]
중동 무슬림 선교사역의 실제
무슬림의 사역의 실제는 여러 방법으로 시도되었다. 최초의 회심운동 972년부터 시작으로 이루어지면서 십자군 당시 강제 회심이 일어나게 된다. 13세기 레바논 트리폴리의 윌리암이 이슬람 문화와 언어를 공부함과 복음 설교를 통해 단순한 생활 양식과 기적들이 리비아, 아스콜리의 콘라드 (Conrad of Ascoli), 15세기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아랍어를 배우고, 요령과 설득을 사용해서 전도하게 된다. 1800년대 후반 인도네시아에서는 지역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고 공격적인 변증과 토착화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사역이 이루어졌다. 알제리에서는 화이트 교부들 중심으로 1800년대 후반에 아랍어와 현지 문화를 사용함으로, 에티오피아에서는 1910년경 전도에 있어서 무슬림 종교지도자들에게 집중하여 선교사역을 했다. 또한 정치적 종교적 참사들 속에서 수 천명의 무슬림들이 교회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회심운동이 일어난다, (인도네시아, 1965; 1979년 이란에서의 이슬람 혁명; 1990년대 알제리아; 1971 독립 이후 방글라데쉬)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매체와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사이의 대화, 꿈과 환상 등을 통해서 무슬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해 오셨다. 특히 1800년도 중반 오토만 제국에서 무슬림이 회심하는 것이 불법 일때, 근동의 개신교 선교는 교육적이고 의료기관 등을 통한 선교와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구호에 집중 했었다.
시리아: 현재 시리아의 위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현존을 무슬림 가운데 어떻게 나타내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4백만명의 시리아 난민은 어디에 있는가? 난민들의 집단 거주지는 자연스럽게 형성 되었다. 95%가 5개국에 거주하고 있다. 레바논(120만), 터어키(190만), 요르단(636,000), 이집트(132,375), 이락크(249,463)등이다. [cm_simple_footnote id=”6″]
요르단: 요르단 내 시리아 난민 현황은 2012년부터 유입, 2013년 대규모 난민 유입하였고, 2015년11월 총 633,644명 (요르단 인구 6백5십만 추정시 약 10%차지) 17세미만 청소년이 50%차지, 이중 75%가 12살이하). 시리아 난민은 요르단 켐프내 거주자가 17%이다. 이들을 UNHCR(유엔 난민기구)중심으로 UNICEF, WHO, NGOs 등이 주거(천막, 컨테이너), 생활품, 의료, 교육등 전액 무료 지원하고 있다. 두 번째 그룹은 도시 거주 (켐프 외부, 83%)하는데, 집을 빌려서 초기 요르단 북부 중심으로 거주했으나 현재 전국에 걸쳐 있음 접근이 쉬어 다수의 사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레바논: 왜 레바논이 난민들이 체류지로서 유리한 것인가? 시리아 내전 이전부터 수많은 생활(취업) 이주민들이 이미 레바논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의 권유와 동일 언어로 아랍어, 문화, 등이 같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하다. 레바논과 시리아는 레바논 독일 이전에 한나라였다. 시리아인은 법적으로 자유롭게 레바논을 드나들 수 있다. 문제는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난 현재 레바논은 전세계에서 면적당 난민 수용치가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시리아에서 온 난민은 레바논 전체 인구의 4분의 1정도가 되었다. “레바논 근대역사에서 가장 높은 난민 수용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레바논 혼자 이 짐을 짊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안토니오 구테레스(Antonio Guterres) 유엔난민기구 고등판무관 이 말했다. “레바논에 있는 시리아 난민들 중 절반이 아이들입니다. 학교를 다녀야 하는 아이들만 400,000명이며 이 수는 공립학교에 다니는 레바논 아이들 수를 훨씬 넘어선 수치입니다. 레바논 공립학교들은 100,000명의 시리아 난민 어린이들에게 학교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더 많은 수의 아이아이 수용하는 것은 그 능력에 제한이 있습니다. [cm_simple_footnote id=”7″]
유럽과 독일 중심의 디아스포라, 난민 상황과 사역은 2011년이후 400만 명이 시리아를 떠났고, 내전으로 인해 인구의 4%안 100만명이 사망 하였고, 이락크와 시리아에서 40만명이 유럽에 도착, 사회적 영향을 평가하기에는 어렵지만 경제적으로는 유리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현재 독일 100만 명 이상 수용, 영국에는 20만명, 또 다른 국가들은 특히 이태리, 그리스는 다른 EU국가들에 재배치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 난민은 기동력과 힘이 있는 젊은 층이기 때문에 건강 등 정착 국가의 복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을 뿐 아니라, 국가 경제력에도 도움이 된다. 독일의 경우는 노동력이 줄어들어 2030년이면 6백만 명의 노동인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난민 유입이 불가피 하다는 것이다. [cm_simple_footnote id=”8″] 이러한 난민들을 선교적 차원에서 사역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 사역을 준비하여야 한다.
터키: 이집트의 사역자와 대화, 시리아 난민이 3백만이 있다고 한다. 앙카라에서 사역자는 말하기를 2016년 3월에 도착했는데 시리안 교회 모임을 2곳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란 난민은 10년전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 이란 난민더 10만명 정도 있다고 한다. 2007-8년 70명 정도였는데 현제 10만명이 된 것이다. 영국 선교부 엘람 선교회는 큰 선교 댠체로서 이란 난민 사역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는데 현재 이란 난민 교회가 100개가 세워졌다고 한다. 10만명중 교인이 2500명이 된다. 터키는 난민들을 여러곳으로 흩어놓게 하여 여러지역에 있다고 한다. 한편 성경보급을 하고 있는데 한 선교 단체에서 계획하고 있는 것은 3만권 목표를 두고 한다. 현재 2천권 정도 보급했다. 성경 보급의 전략을 이란인 목사들을 통해 전국 100개의 교회가 있는 곳에 신자들을 선택하여 100권씩 성경을 주어 시리안 난민, 이란인 난민들에게 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어떻게 유럽교회들이 무슬림 사역을 할 것인가?
난민은 하나님의 선교 기회라고 볼 수 있다. 유럽교회들이 중동의 난민들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선교학적으로 볼 때 시리아와 이락크에서 발생하는 난민들의 위기와 교회의 반응은 교회사에서 무슬림 선교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독일 개신교와 동구 유럽을 통해 들어오는 난민들을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에 고민 하여야하고 적극 참여해야 한다. 현재 독일 개신교와 디아코니회는 정부의 난민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적어도 10만명 정도를 이미 돌보고 있다. 독일교회들은 난민이 쉐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의 기회라고 점점 인식해 가고 있다. 독일 복음주의 연합의 이슬람 사역 책임자인 ‘울리히 뇨이엔하우젠(베르그노위스타트)는 몰려드는 난민들을 그들의 종교에 상관없이 위기상황에 있는 그들을 도울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독일내의 무슬림 단체 등 회교 공동체들은 독일 내 난민 40만명의 난민 38%가 무슬림 임에도 아무도 난민들을 돕기 위해 나서지 않고 있다. 터어키, 요르단, 레바논 등의 국가에서 난민들에 대한 큰 짐을 지고 있는 반면 부유한 산유국인 사우디 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두바이, 카타르 등은 전혀 난민수용을 거부하고 있는 형편이다. [cm_simple_footnote id=”9″]
유럽에 있는 한국 교회들이 유럽교회들과 함께 이들을 영, 육 간에 도울 기회를 찿아야 한다. 이들은 마음과 육신이 지쳐 있다. 그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있을 곳을 제공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충족해 줄 수 없는 부분이 영적인 부분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유럽의 한인교회들이 현장에 있는 단체나 사역자들과 협력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 물질로서 지원을 하되 간단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료; 전도지, 성경들을 배급하는 길이다. 문제는 아랍어가 되는 사람이 준비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 이집트인 의사팀
기도로 단기 팀을 준비하여 실버 선교, 어린이선교, 미디어 선교 활영 하도록 한다. 장기 팀으로 현지인 사역자와 함께 재배치를 통해서 하도록 한다. 현지 교회들과 협력 강화, 다른 디아스포라 교회와 공급한다. 재정적 서포트가 필요하며, 파트너십 등이다. [cm_simple_footnote id=”10″]
결론:
현재의 시리아 참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현존을 무슬림 가운데 어떻게 나타내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훌러신학교의 우두베리 교수가 750명의 BMB를 인터뷰하면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게 했는가를 질문을 근거로 리서치에서 발견된 것은 첫째, 그들이 살아내어진 믿음 (Living faith, Lived faith가 아니라), 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보았고, 사랑의 기반이 된 그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보았으며, 지역 문화와 종교적 가치들을 향한 민감성과 열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두번째로, 모든 사람, 특별히 원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했다고 말했다. 우드베리 교수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헌신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도록 인도할때, 많은 무슬림들이 말하기를 “나도 그 참된 교제가운데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 이슬람의 긍휼사역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럽의 있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긍휼사역에 우리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으며, 참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성도에게 주신 대 명령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 해야 할 사명이 있고 순종해야 한다. 이 막중한 일들을 한 교회, 한성도가 할 수 없으므로 협력해서 이 일을 이루어야 한다. 한국교회들이 힘을 합하여 연합과 현지교회들, 그리고 사역자들이 협력하여 이 일을 담당해야 할 때이다. 난민사역을 너무나 크고 엄청난 사람들을 도와야 함으로 재정적, 시간적으로 투자 해야 하고 각종은사와, 각 방면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므로 대 협력을 통해서 네트워크 필요성이 요구된다.
[각주] ——————————————————————————–
1. 정마태, 무슬림 선교 어떻게 할 것인가? Article
3. 온누리 교회 “긍휼사역의 성경적 근거”
4. ibid
5. Rupen Das, “난민사역의 기초와 철학” 강의안
6. 암네스티(2015), http://amnesty.or.kr/11808
7. 유엔난민 기구 “시리아의 미래; 레바논으로 이주한 시리아 난민 백만영 돌파”
8. 이슬람 파트너쉽, “난민을 생각하며”:2015년 암만 난민사역 써미트 자료집, p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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